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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골이 울릴 만큼 시끄러운 음악이 귓가에 계속해서 때려박혔다. 딛고 선 바닥으로 소리의 파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몸까지 박자에 맞춰 얕게 진동한다.
아까부터 머리가 핑핑 돌았다. 팔에 매달려 조잘조잘 귀엽게 말을 걸던 체구 작은 남자가 건네 준 술잔을 넙죽 받아 마시고서부터 계속 그랬던 것 같다.
점점 이상하게 열이 오르는 몸을 은근슬쩍 손으로 더듬어 대던 남자를 겨우 떨쳐내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정태의는 상이 여러 개로 갈라져 보이는 시야에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고는 비틀거리며 으슥한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툭. 앞을 보지도 못하고 무작정 걷다가 돌연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혔다. 다부진 몸에 밀쳐진 상체가 살짝 휘청이고, 벽을 짚으려 뻗은 손이 방향을 잃고 허우적대자 눈앞의 남자가 팔로 허리를 감아 몸을 지탱해 준다.
"―아…. 죄송합, 감사함니다……."
얼굴을 마주 볼 정신도 없이 인사를 건넸다. 풀린 혀 때문인지 입술 사이에서 발음이 마구잡이로 샌다. 전정기관이 고장이라도 난 것마냥 균형을 잡기가 영 힘들었다. 지끈한 어지러움이 머리 구석구석을 휘감고, 양쪽 눈꺼풀은 추를 매단 듯 자꾸만 감긴다.
"쯧, 이래서야……."
혀를 차며 알아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남자가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멀어져 가는 정신을 다잡으려 온 감각을 곤두세웠지만 뺨을 살살 쓰다듬는 따뜻한 손에 저절로 힘이 풀려 저항 없이 고개를 묻고 말았다.
"그러게 왜 아무 거나 받아 마셔서는……."
낮게 긁는 목소리가 꿈결에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다. 흐릿한 시야에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이 언뜻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끝없이 확장하는 우주의 티 없는 흑색을 담은 듯한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암전이었다.
* * *
솨아아아. 어디선가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온다. 그 미세한 소음 때문에 잠에서 막 깬 정태의는 비몽사몽간에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가슴에서부터 발 아래까지를 덮은 이불의 감촉이 왠지 평소와 다르게 이질적이었다. 뭔가……. 무언가가 확실히 이상했다.
"……?"
눈을 뜨고 고개를 살짝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보는 곳이다. 멀리 보이는 화장실에서는 누군가 씻고 있는 것 같다. 아까부터 나던 물소리의 정체를 드디어 알게 됐지만 그 안에 든 게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 현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점인 듯하다.
혹시. 설마. 퍼뜩 든 생각에 그건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상체에 힘을 주자마자 허리와 허벅지 부근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앓는 소리를 냈다. 침대에 다시 드러누운 정태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쁜 예감이 딱 맞아떨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 그래도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거니까…."
정태의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이불을 휙 걷어 제 몸을 확인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의 상태는 객관적으로 봐도 결코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온 몸을 뒤덮은 울긋불긋한 키스마크들 위로 소름 돋는 잇자국들까지 여기저기 찍혀 있었던 탓이다.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안 깬 나도 참 대단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정태의는 한숨을 한 번 깊게 내쉬고는 아픈 몸을 천천히 움직여 침대 밑 바닥에 허물처럼 내팽겨쳐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스스로도 참 신기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한창 샤워 중인 저 자가 아마 어젯밤 나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한 사람이겠지. 다 씻고 나오면 사과라도 하든가 해야겠다. 혹시 밤에 있었던 일이 하나도 기억 안 난다고 하면 기분 나빠할까…? 아니, 그래도 고작 하룻밤인데. 괜찮을 거라고, 정태의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아래였다니……. 그쪽은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의 술집을 추천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모러 그 망할 자식이었다. 인간계에 처음 내려가 본다고 하니 음흉하게 웃으며 그곳에 꼭 가 보라고 했었지, 아마. 그렇게 시끄럽고 정신없는 곳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거다.
예전에 모러가 직접 불법적으로 개조한 총기를 쥐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들켜 그대로 반납한 적이 있는데, 이 옹졸한 놈은 아직까지도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몇 차례나 사과를 하고선 새 총도 구해다 줬건만……. 하여튼 뒤끝도 더럽게 길다.
툴툴거리며 혼자 열심히 모러 자식의 흉을 보던 찰나, 굳게 닫혀 있던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있던 남자가 걸어나왔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알몸의 남자와 갑작스럽게 눈이 마주쳐 놀란 정태의는 주춤거리다가도 이내 머쓱하게 목덜미를 손으로 문지르며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
아니, 건네려고 했다. 잘 짜여진 근육으로 뒤덮인 탄탄하고 새하얀 다리 사이에 자리잡은, 그 인간같지 않은 물건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
정태의는 입을 떡 벌린 채 일순 말을 잃고 말았다. 저, 저, 저게…. 어제, 내 아래에, 들어왔다고? ……저게? 저 크기가?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차마 믿을 수 없는 사이즈였다.
"……."
"태이."
미치겠다. 인간과 통성명까지 마쳤나보다…. 정태의는 순간 다시 도지는 어지럼증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인상을 찡그린 그의 표정에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표정을 굳히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에 당황한 정태의가 슬슬 뒷걸음질을 쳤지만 몇 걸음도 떼지 않아 벽에 등이 부딪히고 만다.
이걸 어쩌지.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에 눈을 질끈 감자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는 게 느껴졌다. 차가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따뜻한 체온에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풀었다. 몇 초간 이마를 어루만지던 남자가 열은 없군, 하고 중얼거린다.
아, 뭔가…. 그 낮고 깊은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 본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몸도, 체구도….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하지만 착각이겠지.
얼마 전까지 천사군단의 최전선에서 마계에서부터 몰려오는 마물들과 싸우는 능천사의 계급에 속해 있었던 정태의는 지금껏 일에 치이느라 인간계에는 한 번도 내려왔던 적이 없었다.
최근에야 말하기 민망한 사정 때문에 일반 천사 계급으로 내려와 여유로워진 탓에 인간계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고로 전에 따로 인간을 만난 적은 결코 없었다.
"정태이."
"……아."
잠깐 한눈을 팔고 있었던 것을 들켰는지 남자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전보다 살짝은 멀어진 거리에 무심코 눈이 아래로 향한다. 그 덕에 다시 그 흉흉한 물건과 마주쳤다. 잔잔하게 붉어지는 정태의의 얼굴에 의문어린 표정을 지은 남자가 정태의의 시선을 타고 내려가 숨김없이 드러난 제 아래를 봤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정태의와 눈을 맞춘다.
"지금 내외하는 건가?"
"……엉?"
"네가 품었던 물건이다.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줄곧. 꽉 물고 놔 주질 않더군."
비스듬히 틀어올린 입술 사이로 어질어질하게 쏟아지는 적나라한 음담패설에 정태의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젠 정말 말해야겠지. 정태의는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어제 그 일 말입니다."
"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납니다. 복도에서 마주친 이후로……."
수년 간 천사군단에 속해 있었던 탓에 딱딱해진 말투로, 정태의는 열심히 변명했다. 혹시나 저가 달라붙어 어쩔 수 없이 자게 된 것이라면 정말 죄송하다, 피해 보상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돈을 드리겠다, 그래도 말없이 떠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등등.
주절주절 말들을 늘어놓을수록 차갑게 식어가던 남자의 얼굴은 정태의의 입에서 어제의 일은 모두 없었던 걸로 하고 싶다, 잊어달라, 하는 말이 나오자 최고조에 달했다. 표정이랄 것도 없이 형형한 기색을 내뿜는 안광이 섬뜩하다. 말을 맺고는 고개를 올려 그 얼굴을 발견한 정태의가 순간 멈칫했다.
"……잊으라고?"
"……!"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함과 동시에, 남자는 순식간에 정태의의 어깨를 벽에 세게 밀치고 입술을 맞댔다. 쩡 굳었다가 정신을 차린 듯 가슴팍을 두드리며 밀어내는 양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아 누른 남자는 입술을 터뜨릴 듯 부딪혀 오면서 정태의의 입 안 곳곳을 탐닉했다.
"흐우…! 으읍……."
하려던 말들이 전부 남자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뜨겁고 두꺼운 혀가 입천장을 간지럽히듯 쓸자 정태의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남자가 더욱 격렬한 키스를 퍼붓는다.
혀와 혀를 한참 동안 섞으며 간간이 숨 차는 소리만을 흘리던 정태의는, 그러나 거침없고 저돌적인 남자의 태도에 당황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찌잉― 하고 귓속을 울리는 이명 같은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제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이다.
원래 따로 상부에 보고를 하거나 임무차 인간계에 내려올 때에는 따로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 이외의 경우에는 24시간이 최대였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천계로 자진해서 돌아가지 않는다면 1초만 지나도 위에서 소환 명령이 칼같이 떨어져 강제적으로 복귀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재 정태의의 경우는 후자에 속했다. 게다가 방금 울린 소리는 강제 소환 10초 전에 울리는 경고음이었다. 이런 미친…. 정태의는 잠깐 입술이 떼어진 틈을 타 다급하게 말문을 텄다.
"프하…! 나, 나 돌아가야……! 웁―"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말 그대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몇 초도 채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저 멀리 있는 문으로 달려 나가기도 어려웠지만, 그 전에 이 거대한 남자를 떼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인간 앞에서 소환을 당했다간 나중에 인간계를 샅샅이 뒤져 당사자를 찾아 내서 기억을 지우는 것도 일이었고, 더군다나 이 남자는 천족인 자신과 몸까지 섞은 자였다. 마음이 불편하다. 젠장, 애초부터 인간과 이런 식으로는 엮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 몰라. 난 이제 몰라. 끝내 정태의가 체념하는 순간.
"……!"
사아아――
영검한 빛이 정태의의 몸에서 서서히 흘러나온다. 나선형으로 신체를 온통 휘감는 신력이 반짝거리며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것을 뒤늦게 눈치챈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맞붙혔던 입술을 떼었다.
황홀하리만치 눈부시게 발광하는 힘이 정태의의 주변을 유영하듯 맴돈다. 피부는 조금씩 투명해지고, 몸체는 점점 가벼워진다. 인간계를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정태이…!"
"……?"
바닥이 그대로 투과되어 보일 만큼 투명해진 손을 바라보다가, 앞에서 누군가가 황급히 외치는 제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그 남자다. 그런데 어째……. 낭패감이 어린 듯한 표정이다. 왜지? 나를 이미 알고 있었나?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은 한 번도 인간을 만난 적이 없었다.
딛고 선 바닥에서 두 발이 서서히 떨어진다. 위로 붕 떠오르는 몸은 이제 눈도 뜨기 힘들 만큼의 거룩한 빛에 파묻혀 있었다. 증폭하는 신력 때문에 찡그린 눈 사이로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자가 제게로 손을 뻗는 것이 언뜻 보인다.
"정태의!"
남자가 다시 한 번 정태의의 이름을 외쳤다. 그는 그 정확한 부름을 듣고 기묘한 기분에 휩싸이며 생각했다. 그래봤자 잡지 못한 텐데. 저 인간은 뭐에 그렇게 분노해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어제 처음 만난 인간이 왜 날 잡으려 드는 걸까. 설마… 내게 첫눈에 반했을 리는 없고…….
연달아 떠오르는 의문에 정태의는 쏟아지는 빛 사이로 끝까지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남자가 기어코 뻗은 손은 정태의의 육신에 닿지 못하고 쑤욱 통과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 보이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돼서야, 정태의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형체를 특정할 수 없는 공간이 여러 방향으로 꺾이고 휘고 접혔다. 인간계와 천계를 이어 주는 통로로 몸이 접어들며 무겁고 혼란한 것들이 깨끗이 소멸되는 익숙지 않은 감각을 한참이나 느끼고, 마침내 그 이상하고도 신비한 느낌이 멎었을 무렵.
정태의는 천계에 도달했다.
* * *
남자는 말없이 방금 전까지 천사가 있었던 자리를 응시했다. 남아 있는 신력의 황금빛 잔재가 따끔하게 피부를 위협한다.
신력과 마력은 상극이다. 몰아치는 정태의의 신력을 아무런 방어 없이 그대로 받아낸 탓에 넓은 면적으로 상처를 입은 피부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핏줄이 손등 위로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그러쥔다.
남자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판단할 수 없는 막대한 마력을 지닌 채로 태어났다. 심지어는 주인에게까지도 복종하지 않고 날뛰는 힘이 몸을 계속해서 좀먹었기에,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마력을 최대한 억눌러 주는 베일을 쓰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 생활하기도 불편한 것을 벗어던진 건 천사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였다.
꽤 오래 전부터 고대해 왔던 날이다. 오늘을 위해 베일까지 버리고는 몸 밖으로 한없이 넘실거리는 방대한 양의 마력을 인간계에서 며칠은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전부 갈무리할 수 있게끔 노력했다.
자칫하면 신체 내부에서 힘의 불균형이 일어 자폭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 불가능한 일을 이뤄냈다.
그리고 오직 이 날만을 기다렸다. 천사가 처음으로 인간계에 내려갈 날을.
신력을 숨겨 가장 약해진 상태의 그를 눈앞에서 포획하기 위해 군단장 급의 인원들을 추려 미행까지 붙이고는 일레이 자신도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천사가 미개한 인간 하나에게 이상한 것을 받아 마시고서부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발견하자마자 바로 신력 억제기를 씌워 그를 데리고 마계로 데려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지만, 막상 약물에 절어 목까지 새빨개진 채로 비틀거리는 모습을 마주하니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차원 속에 숨겨 두었던 억제기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근방의 가장 큰 호텔로 향한 남자는, 그대로 천사를 안았다.
침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열에 들떠 아랫도리를 남자의 몸에 대고 문지르던 그를 똑바로 눕힌 뒤 하의를 벗겼다. 벌써부터 묽은 액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을 보니 앞은 좀 놀려 본 모양이었다.
확 짜증이 나서 손가락도 넣어본 적 없는 듯 꽉 다물린 뒷구멍에 침을 뱉고 대충 넓힌 뒤 예고도 없이 물건을 삽입했다. 처음에는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쏟던 천사는 약기운 때문인지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 허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남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열렬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머리에 담았다. 취한 건 천사 하나뿐인데, 언제부턴가 자신의 뇌까지 열에 취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정사 후 기절하듯 잠든 천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계획을 변경했다. 강제로 끌고 가기 전에, 이 고결한 천사의 의견부터 먼저 듣고 싶었다. 만약 같이 마계로 가자는 청유에 그가 긍정의 답을 내놓는다면 기분이 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바로 앞에 있는 가장 쉬운 수단을 두고 미루고 또 미루다가, 결국 어처구니 없게 눈 앞에서 천사를 놓쳐 버렸다. 게다가 약이 생각보다 훨씬 독했는지 그는 어제의 일을 단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고작 하룻밤 몸을 섞은 것을 제외하면 이전과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그 사실이 상상 이상으로 불쾌하게 다가왔다.
남자, 전무후무한 힘을 가진, 마족 중에서 가장 강한 악마―일레이 리그로우는 화가 났다. 처음에는 답지 않게 그릇된 판단을 내린 자신에게 분노했고, 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혼자 떠난 천사를 탓하다가, 마지막에는 당연하게도 천사를 그렇게 만든 인간에게로 화살이 돌려졌다.
판단의 근간이 될 과거의 데이터가 없는 천사의 경우와는 달리, 인간의 처분은 빠르고 쉽게 결정됐다. 눈에 거슬리면 생명을 앗는다. 그 인간을 찾아내 잘근잘근 밟아 죽여 놓은 뒤 마계로 향한 일레이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것은 현재로써 가장 쉽고 빠르게 그의 천사를 제 곁으로 끌어 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 * *
불안정한 기운이 어지럽게 섞인 무채색의 하늘을 활보하는 백룡과 흑룡들이 긴 공명을 토해낸다. 천족의 하얀 날개와 대비되는 마족의 검은 날개가 하나의 드넓은 하늘에서 서로 마구잡이로 뒤엉킨다.
하나하나의 위력이 막대한 거창들이 직선을 그리며 적군의 진영 쪽으로 쇄도한다. 신력을 근간으로 만든 포탄이 악마들의 몸을 잔인하게 녹이고, 마력을 불어넣은 총알이 천사들의 육신을 터뜨린다.
아래에서 위로 용솟음치는 거대한 백색 구름 기둥들이 각각 수십의 악마를 집어삼키고, 거세게 휘몰아치는 흑색 폭풍 꼭대기에서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뇌전이 한꺼번에 수백의 천사를 휘감아 덮친다.
정태의는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도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차게 식은 머리로 날아오는 무기를 피하고, 목을 노리는 적에게 대항하고, 도움이 필요한 아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족과 마족의 사이가 그렇게 좋진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당장 정태의가 능천사 계급에 있었을 때만 해도 그렇다. 악마들이 고의로 천계에 침입시키는 수백, 수천의 마물들을 상대하고 보고를 올리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정태의였다.
태초부터 신력과 마력은 상성이 맞지 않았기에, 악마와 천사는 서로 잠깐이나마 협력할 순 있어도 완전한 화합을 이룰 수는 없는 관계였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으며 그동안 서로 나름대로 이해하며 살아왔었다.
역사서에 기록된 마지막 천마전쟁도 벌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과거였다. 책에 의하면 그 길고 길었던 대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한 번도 규모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껏 정태의가 해 왔던 마물과의 자잘한 전투들은 전쟁 축에도 끼지 못하는 작은 소란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정태의가 인간계에서 천계로 소환당하고, 그 날 밤을 함께 보냈던 인간을 찾지 못한 채 속절없이 흐른 시간이 딱 한 달이 됐을 때. 정말 뜬금없이, 갑작스럽게, 천계는 마족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것도 무려 천궁 한가운데에.
다행히 바로 얼마 전에 단단하게 보수한 보호 결계 덕분에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그 사건이 악마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위쪽에서는 난리가 났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래. 뭐라 말할 것도 없이 곧바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예전이었더라면 능천사로서 군단의 맨 앞에서 천사들을 지휘했어야 하는 정태의는, 현재 중간에서 싸우다가 여러 번 자리 이동을 한 뒤 최종적으로는 뒤쪽의 높은 허공에서 유영하며 방어진을 형성하거나 무기를 보충하는 등의 일을 맡고 있었다.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남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날며 전장을 바라보고 전세를 파악하던 정태의의 눈에, 순간적으로 기이한 것이 스쳤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는 고도를 조금 더 낮춰 보았지만 보이는 건 조금 더 선명해진 '그것'이었다.
"말도 안 돼……."
충격적이게도 정태의가 전장 한복판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아이였다. 그것도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애.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쟁 전에 아이와 노인, 임산부 등의 약자는 인간계나 정령계로 대피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니. 그것은 천족이든 마족이든간에 상관 없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대피 대상 1순위인 아이가 버젓이 전쟁 지역에서 홀로 날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정태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곤 곧바로 날개를 접어 수직으로 하강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 아이에게 다다르기 위해서였다. 천사인지 악마인지는 상관 없었다. 아이는 언제나 보호해야 할 대상이니. 그러고 보면 저 주위에 있는 놈들은 눈이 삐었나, 애가 있는데 빨리 대피시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마침내 작은 아이 근처까지 날아간 정태의는 그 아이가 악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머리 위로 조그맣게 난 뿔과 채 숨겨지지 않은 검은 악마의 꼬리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정령계보다는 인간계로 가는 게 더 낫겠다. 판단을 마친 정태의가 아이에게로 가까이 날아갔다.
아이의 밝은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리며 완전히 드러난 까만 눈동자 한 쌍이 정태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애답지 않은 진득한 시선에 잠깐 멈칫한 정태의는 아이의 옆구리에 두 손을 넣고 번쩍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살짝, 어딘가 익숙한 외형인데….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가, 어른들이 미안해. 괜찮을 거야. 형이랑 같이 아래로 내려갈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위로하듯 말하면서 아이와 함께 빠르게 이동했다. 한 팔로 작은 엉덩이를 받치고 안은 채 나머지 손으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토닥였다. 혹여나 너무 잔인한 광경에 충격을 받았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때였다. 돌연 사방이 고요해진다. 끊임없이 터지던 무기 소리와 군사들의 고통 어린 비명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멎었다. 길게 울던 용들까지 소리를 멈춘, 무섭도록 침묵이 가득 찬 공간.
쩌적― 쩌저적―!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창공 중앙에 균열이 일었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소리에 정태의는 아이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들어 급하게 제 한쪽 귀라도 막으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꿔 아이의 귀를 막아줬다.
허공을 찢어 가르고 튀어나온 괴괴한 마물의 형상에 천사들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고층 건축물 몇 개를 이어 붙인 것만큼 거대한 그것은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목표물을 정한 듯 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직진했다.
"어…? 잠깐! 거긴……!"
거긴 우리 형이 있는 곳이잖아! 싸한 위험을 느낀 정태의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데려다 줘야 한다는 목적도 잊고 다급하게 그쪽으로 날아올랐다. 그렇지만 이미 정재의의 코앞으로 다가간 마물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우우웅, 묵직한 소리를 내며 움직인 그것의 육중한 꼬리가 정재의에게로 휘둘러짐과 동시에.
"잡았다, 태이."
정태의의 귓가에 속삭여지는 익숙한 목소리.
그 소름이 끼칠 만큼 낮게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뒷목에서 느껴지는 역치 이상의 통증에 몸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대로 낙하할 뻔한 몸뚱이를 누군가가 단단히 붙들어 잡았다. 제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목에서부터 시작해 온 육체를 강하게 옥죄는 무언가 때문에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태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물이 나오며 생긴 균열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자신을 안은 누군가가 그쪽으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듯했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그 틈 속의 끝없는 암흑은 결국 정태의를 꿀꺽, 삼켜버리고는 입구를 닫아 바깥을 차단한다.
균열이 닫히기 직전 스며든 빛이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을 잠깐 동안 비췄다. 아까 구했던 아이와 외형이 꼭 닮은,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형……."
꺼져 가는 불씨처럼 미약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정태의는 따뜻하고 커다란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 * *
매섭게 불어치는 바람이 뺨을 할퀸다. 신력이 가득 섞인 공기 입자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에 귀가 다 먹먹해진다.
웅장하게 펼쳐진 설산의 맥을 따라 천계의 경계선을 순찰하던 정태의의 눈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손톱보다 작은 검은색 무언가가 그 자리에 가만히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눈을 찡그리고 몇 초 동안 자세히 보니 한 인영이다.
그 사람은 임무를 마친 정태의가 등을 돌릴 때까지 한참을 그곳에서 서 있었다. 경계선 너머의 방향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는 악마인 듯했다. 마물의 형체가 아닌 인간형의 마족이라 그리 문제되진 않을 것 같지만 보고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순찰을 마쳤다.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떠오른 기억. 아, 기억 났다. 이거 그때구나. 내가 능천사가 되고 나서 처음 맡았던 순찰 임무.
발령 첫 날 마주친 악마로 추정되는 인물은 이후로도 간간이 정태의와 동선이 겹쳤다.
어느 날은 망원경을 가져 와서 자세히 보려고 했었지만, 막상 렌즈 너머로 관찰한 그 악마는 허리춤에 찬 범상치 않은 검 하나를 차고 있었지만 시커멓고 긴 로브를 걸친 데다가 얼굴까지 다 덮는 흑색의 면사포 같은 걸 뒤집어 쓰고 있어 건진 것이 없었던 기억도 난다.
이목구비가 아주 살짝씩 비치는 그 면사포는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허리 밑까지 떨어지는 길이였다. 커다란 몸집으로 곱게 떨어지는 선은 시선을 절로 빼앗을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고아했다.
처음 몇 달이 그렇게 흘러가고, 정태의는 더 이상 순찰이 아닌 직접적인 마물 토벌 임무를 맡기 시작했다. 그렇게 검은 악마와는 인연이―딱히 인연이랄 것도 없었지만―끝나나, 싶던 와중. 같은 천사 동료들에게서 아주 오랜만에 그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한 인간형 마족이 얼마 전부터 천계 바로 근처의 이곳저곳에 마물들을 보내고는 자신은 뒤에서 관전하며 영역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참고 참다가 너무 거슬려서 상부의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그에게 달려든 천사들이 전부 피투성이가 되어 목숨만 겨우 붙은 채 실려 왔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마력으로 입은 상처라도 시간을 들여 신력으로 치유하면 금방 낫기 마련인데, 그 악마는 무기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 아무리 신력을 퍼부어도 낫기는커녕 상처가 더 곪는다고 했다.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으니 무작정 확정지을 순 없었다. 하지만 머리에 면사포를 덮어쓰고, 결정적으로 악한 기운을 여실히 풍기는 거대한 마검을 들고 있었다는 말에 얼추 그자가 맞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리그로우―랍니다. 당연히 진명은 아니겠지만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공격해 오진 않는데, 몸에 손을 대면 갑자기 돌변해서 날개를 뜯어갈 기세로 천사를 다져 놓는다고 하니 말입니다…. 어지간한 또라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상부에는 보고해 봤나?'
'진작 했답니다……. 근데 그 악마가 무슨 대단한 자라도 되는지, 위에서 마계와 몇 번 연락을 주고받더니 그냥 그대로 놔두더랍니다.'
'유서 깊은 마족 가문의 귀하신 도련님이기라도 한가보군.'
다른 구역의 후임 천사와 나눈 대화에서도 대충 그의 성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일단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서진 않는구나…. 그렇지만 자신과 마주쳤을 때는……. 아, 그때는 그냥 말을 안 했었지. 정태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제 소문을 들었는지 그 대화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태의는 드디어 그 유명한 악마와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예전 그 어느 때처럼 먼 거리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들뜰 만도 했지만 들려오는 말들이 워낙 험해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나 제발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가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정태의의 바람과는 달리, 그날 그는 리그로우라는 악마에게 단단히 낙인찍히고 말았다. 불과 며칠 전에 리그로우의 손에 친우의 팔 한 쪽을 잃은 천사 하나가 어디선가 뛰쳐나와 마물들을 가르고 그에게로 돌진했기 때문이었다.
그 천사에게로 마주 달려 나가려는 리그로우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정태의는 옆에 있던 모러 자식의 애착 총을 잽싸게 뺏어서 긴 베일에 가려진 그의 뒤통수 쪽으로 냅다 들이밀었다.
머리에 전해진 딱딱한 금속의 감각에 잠깐 행동을 멈춘 그는 이내 천천히 뒤를 돌면서 이제 보니 남들과 다르지 않게 평범하고 멍청한, 제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놈이라느니, 실망이라느니 하는 의미 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슬슬 정태의까지 제 목숨에 위협을 느낄 무렵, 그의 숙부 정창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이동 스크롤을 써서 나타나 상황을 정리했다. 한껏 긴장했던 몸에 힘이 풀리고 그곳에 있던 다른 천사들이 신뢰가 가득 찬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인파 속에 섞인 비틀린 시선 하나. 총기 전용 고밀도 응축 신력도 바닥난 빈 총으로 뭘 하려던 거냐고 실컷 훈계를 듣다가 우연히 마주친 리그로우의 한쪽 눈이, 바람에 날리는 베일 사이로 조금이지만 아주 선명히 드러나 어딘가 충격을 받은 듯, 혹은 흥미로운 것을 본 듯.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군. 정태의―라….'
그 흑색. 온 어둠을 몰아넣은 듯한 암흑 같은 눈동자. 그래, 저거였다. 마치 심연을 담은 한 쌍의 시선이 바로…….
* * *
"허억―!"
번쩍. 눈을 떴다. 아득한 환상처럼 생생히 재생되던 장면이 뚝 끊겼다. …역시 꿈일 줄 알았다. 그래도 몇 년 묵은 기억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마주한 적은 없었던 터라 기분이 신기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래, 그 리그로우가…!"
"일레이."
"왁!!"
"리그로우가 아니라, 일레이다."
그 리그로우가 저번에 인간계에서 만난 그 남자였구나, 로 이어졌어야 했던 문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방해꾼에 의해 중간에 끊겨 버렸다. 놀라서 외마디 소리를 내지른 정태의는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잠에서 깨기 직전에 봤던 흑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정말이지…….
"…너였냐."
"경어는 때려친 모양이군."
"그래서 일레이가 누군데."
"나."
내 진명. 덧붙이는 말에 정태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거…. 마족의 진명이란 거, 마족 이외의 종족에게는 쉽게 알려주지 않는 거 아니었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정태의를 흘긋 보곤 피식 웃은 일레이는 옆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가 누워 있는 침대의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정태이. 감은 좋은 것 같던데, 판단 능력이 아주 부족하더군. 게다가 눈치도."
"너가 말해줬으면 되는 거였잖아."
"내가 왜."
"……."
어이없다는 듯 흘겨보자 소리 내어 웃은 일레이는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정태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새하얗고 선이 고운 손가락이 우아하게 움직이며 허공을 배회하다가, 최종적으로는 그의 목에 닿았다.
와아…. 저걸 내가 왜 이제서야 발견했을까. 그는 넋을 놓고 감탄하며 제게로 점점 다가오는 조각 같은 손을 바라봤다.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일레이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만날 때마다 검은 베일을 쓰고 나타난 탓에 볼 틈이 없었던 외양을, 정태의는 그제서야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백옥같은 흰 피부에 결 좋은 은발, 그리고 이젠 누구의 것인지 아는 새카만 눈. 전체적으로 매우 수려한 외모였다. 왜 그렇게 가리고 다녔는지 모를 정도로.
그러고 보니 방금 웃을 때 조금 귀엽던데. 정태의는 일레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감상하며 생각했다.
"불편하진 않는 것 같긴 한데…."
"마?"
그러다가 목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을 눈치챘다. 일레이는 정태의의 의아한 시선을 받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목에 둘린 목걸이인지 초커인지 모를 이상한 물건을 조금씩 몇 번 당겨 확인했다.
"……이게, 뭐야?"
"신력 억제 장치. 마력이 몸에 닿아도 아무 이상 없을 걸."
"이런 걸 왜… 나한테 씌워?"
"그럼, 마계에서 신력 쓰다가 개죽음 당하려고 했나?"
"……뭐? 마계?"
높은 목소리로 되물은 정태의에 일레이는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순 말이 막혔다.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에 처해 있던 상황은 전쟁통 속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다가 어느 순간 마물이 나온 틈으로 자신이 빨려 들어갔었다. 품에는 아이를 안고…….
"맞다! 아이는?!"
"태이…. 정말 모르겠나?"
정태의가 탄식했다. 그 아이도 너였구나. 하지만 대체 왜? 나를 마계로 데려오기 위해서? 왜 나를……. 혼란스러운 듯한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일레이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얼마 전 인간계에서 말이야. 누가 아무 거나 주워 마시고 악마를 미친 듯이 홀려 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
"네가 내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댄 후로 꽤 오랜만에 만난 거였으니. 회포 풀 겸 대화 좀 하고, 겸사겸사 네 의견도 들어보려 했었지.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천계로 튈 줄은 누가 알았겠어. 덕분에 꽤 다쳤었지."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이가 갈리는 듯 일레이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단 한 번의 접촉만 있다면 그 억제기를 씌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악마인 내가 천계로 가는 건 위험 부담이 크고, 혹여 잠입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 넓은 곳에서 널 찾아낼 가능성도 낮아. 그렇다고 네가 인간계로 내려가기까지의 시간을 다시 기다릴 만큼의 인내심은 없었고. 그래서 가볍게 손 좀 썼지."
"미친 놈…. 그 테러도 네가 꾸민 짓이었어. ……넌 전쟁이 가볍냐?!"
"하하아. 약자에게 무른 너이니, 아이로 몸을 변형하는 게 가장 나을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바로 실행에 옮겼지. 결과는… 뭐, 보이는 대로."
일레이의 그 뻔뻔한 태도에 눈을 부라린 정태의의 머릿속에 순간 팟, 하고 한 가지가 스쳐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우리 형. 그 마물에게 공격을 받기 직전의 모습까지 보고 눈을 감았었다. 어떻게 됐지? 많이 다친 건가? 혹시라도…. 불안한 마음에 그는 일레이를 휙 노려보며 외치듯 물었다.
"형은?!"
"……궁금한 게 많나 보군, 태이."
"말해. 그리고 당장 날 천계로 보내 줘. 이것도 풀고."
"싫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떨어진 한 마디의 대답은 정태의의 어이를 상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는 심호흡을 하며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하고,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날 여기서 내보내."
"정태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넌 여기서 영원히 못 나가. 내가 널 왜 데려왔다고 생각하나."
"그게 무슨……!"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이게 더 빠르겠군."
말을 마친 일레이가 정태의의 몸을 순식간에 뒤집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숨을 들이키며 발버둥치는 그의 등허리를 한 속으로 꽉 누르고 입고 있던 흰 옷을 헤쳐 속옷까지 벗겨냈다. 전쟁 때문에 꺼내 입었던, 하나의 천으로 이루어져 있던 천사의 의복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정태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천사의 옷은 참 편리해서 좋군."
"비켜…! 뭐 하는 짓이야!"
"움직이지 마."
휘둘러 대는 팔을 뒤로 꺾어 누르고 다리를 벌려 그 위에 앉자 정태의는 순식간에 제압됐다. 입을 다물지 못하게 턱뼈를 잡고 손을 넣어 침을 묻혔다 빼자 자존심이 상한 듯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뒤로 돌려 일레이를 향해 눈을 부라린 정태의가 사납게 소리쳤다.
"나와! 나오라고…… 허억!"
그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레이의 기다란 손가락이 정태의의 밑을 푸욱 파고들었다. 헙, 하고 숨을 멈추더니 느낌이 영 이상한 듯 작게 우는 소리를 흘린 정태의가 붙잡힌 팔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그만, 빼, 이 미친……."
"이렇게 뒤를 넓혀 둬야 너도 편할 걸."
정태의의 낮은 읊조림에 대꾸하며 손가락 하나를 더 넣은 일레이가 천천히 손을 쑤걱이기 시작했다. 좁은 통로에 버겁게 들어찬 손가락이 찔걱이는 소리와 함께 왔다갔다 움직이며 내부를 조금씩 넓혔다.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까지 들어가자 처음보다는 확연히 구멍이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일레이는 밑에 깔려 부들대는 정태의의 귓바퀴를 깨물었다가 살짝 입을 맞춘 후 아까부터 한계까지 발기되어 있던 제 성기를 꺼내 몇 번 훑었다.
엉덩이골에 부푼 제 욕망을 들이대자 정태의가 티 나게 삐걱댔다. 그 꼴이 약간은 귀여워 한쪽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천천히 구멍 안으로 물건을 마저 밀어넣으려 시도했다.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지는 생경한 감각에 정태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았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일을……."
"이… 씹……. 망할…!"
"하아……. 태이, 힘 풀어."
"아악…! 아파 죽겠다고……!"
반항어린 목소리가 아래에서 작게 들려온다. 그 상태로 성기를 한 마디쯤 더 삽입하자 안쓰럽게 몸을 떨어대는 정태의에 결국 혀를 찬 일레이는 한 번 더 짓치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물건을 귀두 끝부분만 남긴 채 전부 빼내고는, 이내 손으로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 …뺄 거면 다 빼, 이 새끼야……."
"안 빼. 봐주는 건 없으니 가만히 있어."
탁, 탁, 탁, 탁. 연속적으로 피부가 마찰되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어느 틈에 부풀 대로 부푼 물건에서 정액이 파악, 하고 쏟아져 나와 정태의의 구멍 속으로 주입됐다. 그는 안으로 흘러드는 뜨겁고 질척한 것에 몸을 몇 번이고 움칫거리고는 화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일레이에게 억울한 듯 쏘아붙였다.
"흑, 이, 변태 새끼야……. 왜 남의 몸 안에다 싸고 지랄이야…!"
고통으로 인해 정태의의 눈가에 흐를 듯 말 듯 맺힌 눈물을 혀로 할짝인 일레이가 질문으로 대꾸했다.
"너는 악마가 자기 체액에 최음 성분을 섞어 넣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나?"
"……므, 뭐?"
"나도 이런 식으로 해 본 적은 없어서 정도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어지는 일레이의 말을 들은 정태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그 얼굴이 잔뜩 열이 올라 쾌락으로 무너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하아……."
정태의는 피곤해 죽을 것 같은 몰골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요즘 그의 일과는 사람 사는 꼴이 아니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납치해 온 미친 놈은 딱 발정난 수컷 마물마냥 하루에 한 번 꼴로 그 짓을 해 댔다. 전시 상황에 적국 한가운데에서 이게 대체 뭐 하는 꼴인지 모르겠다.
잡혀 온 첫 날 일레이의 정액으로 몹시 흥분해 감도가 예민해진 정태의가 끝에 가서 너무 느껴 자지러지는 모습을 눈도 떼지 않고 지켜 본 그는 답지 않게 옅은 홍조로 볼을 물들이더니, 그 이후로 매일같이 정태의를 안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정태의는 일레이가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는 그의 거대한 성 안에서 여러 눈들에게 감시당하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고, 밤이나 새벽에 일을 마치고 귀신같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 오는 그에게 덮쳐졌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어서 웃기기만 한, 애첩과도 같은 신세였다.
일레이는 정태의를 따로 구속하지 않았다. 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그리 하라고 했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 오려고 별 짓을 다 한 당사자인 것 치고는 꽤 의외로운 태도에 정태의는 그 의중을 파악하려 성 밖으로 불쑥 나갔었다.
그리고 나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그는 다시 일레이의 성 안으로 되돌아왔다.
일레이 그 망할 자식이 며칠 만에 어디까지 소문을 퍼뜨린 건지 가는 곳마다 등에 까만 날개를 단 마족들이 대놓고 자신을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저게 릭이 잡아다가 지 성에 눌러앉힌 그 천사냐, 그놈이 웬 놈의 천 하나한테 미쳤다던 소문이 진짜였나보다, 천사지만 불쌍하긴 하다, 같은 수군거림은 덤이었다.
목에 찬 장치에도 쏠리는 시선들을 겨우 피해 인적 드문 구석으로 숨었더니, 도망치려 하는 줄 알았는지 바로 뒤에서 미행하고 있는 듯하던 악마 하나가 일레이에게 연락해 제 행실 하나하나를 참 자세히도 보고하는 소리까지 들었다. 결국 질릴 대로 질려 곧바로 성으로 돌아 온 정태의였다.
"이게 감금이 아니면 뭐야……. 그리고 매일 그 짓을 해 대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건가, 그놈은."
일 주일에 일곱 번 몸을 섞는 일은 일레이가 주는 최음 효과의 도움을 받는 덕분에 처음 삽입할 때를 제외하면 그렇게 찢어질 듯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주는 쾌락이 고통스러울 만큼 감당하기 힘들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처음 일 주일 이후 어느 날 그가 뜬금없이 정태의에게 날개를 꺼내 보라고 종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바락바락 대들며 반항하던 정태의의 성기 입구를 엄지로 틀어막고 미친 듯이 허릿짓을 해 결국 울음 섞인 항복을 받아 낸 일레이는 사정 후 겨우 눈물을 그친 그의 등 뒤로 성스럽게 펼쳐지는 새하얀 천사의 날개를 홀린 듯이 응시했다.
오랜만에 꺼내는 탓에 조금 좀이 쑤시는지 기지개를 켜듯 날개를 쭉 펴며 살짝씩 움직이는 모양새가 아찔하게 우아해서, 일레이는 한참 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포근해 보이는 속깃털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기분 좋은 느낌에 그대로 손을 문지르자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칫 떨며 일레이의 목에 팔을 감았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다음 날부터 그가 섹스할 때 날개를 꺼내 놓고 있으라며 정태의를 마구 괴롭혔기에, 그는 일레이의 말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가 정태의의 옆에서 서류를 처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저 변태 같은 악마 놈이 저번에 제가 날개를 드러냈을 때 떨어뜨린 깃털 몇 개를 주워다가 만년필로 만들어 매일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까무러칠 뻔 했었던 적도 있다. 양심을 어디 팔아먹은 게 틀림없다고 정태의는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이 오늘 어디 같이 갈 데가 있다고 했었지."
"태이, 여기 있었군."
"……! 깜짝이야…."
한참 속으로 욕을 하고 있던 대상이 거짓말같이 뒤에서 나타나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정태의는 머릿속을 채우던 잡생각을 싹 정리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일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 건데?"
그는 말없이 정태의의 손목을 잡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보폭 큰 걸음으로 얼마 동안 걷자 순식간에 성 밖의 공간으로 빠져나왔다. 대충 입고 있던 헐렁한 천사 의복이 정태의의 어깨 밑으로 흘러내리자, 그것을 눈치챈 일레이가 걸음을 멈추고 옷자락을 올려 정리해 주며 입을 열었다.
"네 옷. 벗기기 편한 것도 좋고 하얀 천이 네 몸에 나온 것들로 푹 젖어서 속이 다 비치는 것도 꽤 절경이긴 하지."
"무, 뭐, 무슨…!"
거리 한복판에서 이상한 말을 지껄여 대는 일레이에 정태의의 낯이 빠르게 붉어졌다. 수치라는 게 없는 듯한 일레이는 내색하지 않은 채 다시 이동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대는 수많은 시선들이 따가웠다.
"내 성 안에 틀어박혀 나만을 기다리며 그 옷을 입고 흰 날개를 살랑거리는,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널 보면 아래가 뻐근하게 당기거든."
"야! 그건 네가 억지로……!"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옷만 입고 생활할 수는 없겠지. 제 분수도 모르는 것들이 은근히 훔쳐보며 탐을 내는 것도 슬슬 거슬리던 참이니까."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한 정태의가 빽 소리쳤다.
"뭔……. 그래서. 내 옷 사러 간다는 말을 그렇게 길게 한 거냐?!"
"아아."
"야! 일레이! 너 진짜……!"
결국 참지 못하고 팔을 잡고 있던 일레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비스듬히 웃으며 정태의를 돌아봤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컸는지 지나가던 악마들까지 걸음을 멈추고 그와 정태의를 바라봤다. 적당하게 이어지던 소음이 어느새 뚝 끊겨 있었다.
어…. 내가 그 정도로 시끄러웠나……? 정태의는 몸을 움츠렸다.
사방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낯선 상황에 당황한 정태의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악마들마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러니까 마치 이상한 것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정태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 일레이……."
더욱 경악스러워진 악마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조심스럽게 제 소매를 움켜쥔 정태의를 재밌다는 듯 한참이나 구경하던 일레이는, 그가 자신의 등 뒤로 슬금슬금 이동해 몸을 숨기고 나서야 피식 웃으며 목소리를 내었다.
"가지, 태이."
"어…? 어어……."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남은 악마들은 튀어나올 듯 크게 떴던 눈을 원상태로 돌리고 떡 벌렸던 입도 다물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각각 작은 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헛것을 들은 게 아니었다, 저 천사는 걸려도 왜 저런 놈한테 걸렸을까,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릭의 가족을 제외하면 본 적도 없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제 진명을 부르게 해 준 거냐, 설마 자기 진명을 천사한테 알려 준 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릭이 미친 게 아닌 이상 직접 알려줬을 리는 없다…….
정작 들어야 할 사람에게는 채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한참 동안 거리를 맴돌다 사라졌다.
* * *
분명 옷을 맞추고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정태의의 기분은 괜찮았다. 마계에 감금당해 있는 주제에 이렇게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굉장히 호화스럽게 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삼시세끼 제공되는 눈이 번쩍 뜨일 민큼 맛있는 음식들과 그 중간중간에 끼어 나오는 후식들. 일레이가 가져다 준―누군가의 마니아적인 취향이 가미된 것 같은―책들도 넘쳐났고, 그 외에 혼자 즐길 수 있는 놀거리들 또한 많았다.
그렇게 편하게 생활하며 제 처지에 조금씩 무뎌지던 정태의를 확 일깨워 준 것은 아까 전 일하러 떠난 일레이와 갈라지고 난 뒤에 만난, 실실 웃는 낯을 계속 유지하던 신기한 인상의 한 남자였다.
'오! 네가 바로 그 정태이구나!'
'……?'
'릭의 면사포를 벗게 한, 릭에게 잘못 걸린, 릭을 한 방 먹인! 이번 전쟁의 트리거! 정재이의 동생!'
면사포를 벗게 한 건 대체 뭔……. 젠장, 전쟁의 트리거라니. 그런 수식어는 줘도 안 가진다고. 싱긋 웃으며 듣기만 해도 울화통이 터지는 말들을 줄줄 늘어놓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에, 정태의는 경계하며 물었다.
'우리 형을 알아?'
'알다마다. 정재이의 무기에 죽어나간 마족이 저 하늘을 꽉 메우고도 남을 걸!'
'아…….'
형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진작 알고 있긴 했었지만, 이렇게 타인의 입장을 듣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정태의가 침울하게 서 있는 것을 본 악마는 박쥐 같은 검은 날개를 한 번 으쓱이곤 몸을 숙이더니 목소리를 확 줄였다.
'있잖아,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
'릭이랑 거의 매일같이 섹스한다는 게 진짜야?'
'…뭐?'
'릭 그놈, 원래 한 번 잔 상대는 거들떠도 보지 않거든.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너한테는 해당 안 되는 사항 같던데. 그놈이 첩 같은 걸 들일 성격은 아니니까. 난 이 상황이 진짜 신기하거든. 태이 네 형한테 고위험군 마물까지 던지고 널 잡아 온 거라며. 맞지?'
그 장난스러운 어투의 말을 들은 정태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무례하고 수치스러운 질문을 들은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까맣게 망각하고 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일레이의 폭력적인 행위와 여러 가지 협박 때문에 첫날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천계로 돌려보내 달라는 말을 꺼낼 엄두도 못 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포기하는 태도를 보이진 말았어야 했다.
심지어는 이곳에 갇혀 있느라 바깥의 상황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정태의는 여전히 웃고 있는 남자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밖에, 전쟁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그 이후로 우리 형을 본 적 있어? 무사해?'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질문을 쏟아 낸 정태의를 남자는 웃는 낯 그대로,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태이, 전쟁은 네가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끝났잖아.'
남자에게 들은 바로는 갑작스럽게 막이 오른 전쟁 때문에 쓸데없는 인력과 자원이 마구잡이로 낭비되어 골머리를 앓던 가장 높은 계급의 천사들에게, 마계가 제안을 해 왔다는 것이다. 일반 천사 하나를 데리고 있으니 이 일에 대하여 후에 아무 문제 삼지 않는다면 공격을 멈추겠다, 라고.
그리고 천계는 그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아무리 천재 무기 개발자 정재의의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천계는 종전을 택했다. 정태의는 그 혼란했던 전쟁이 자기 하나의 희생으로 그렇게나 손쉽게 끝이 났다는 사실에 얼떨떨해하다가도, 천계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착잡함과 허망감을 느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건 이해하지만……. 삼촌은 끝까지 반대했을까. 아니면 망설임 없이 찬성했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어도 전자였으면 좋겠는데. 정태의는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일레이의 집무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걸음걸음이 펑소보다 무거웠다.
얼마 동안 걷자 은색 장식으로 포인트를 준 위압감이 느껴지는 검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똑똑, 가볍게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서류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슬쩍 고개를 돌린 일레이는 문을 열고 들어와 우뚝 서 있는 정태의를 의외롭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살짝 휘어진 눈매를 보아하니 기분이 좋아 보인다. 너는 뭐가 그렇게 즐겁냐…. 나도 좀 웃고 싶다.
"일레이."
"음?"
"날 천계로 보내 줘."
진지한 표정의 정태의가 말을 꺼내자 일레이의 낯이 일순 굳었다.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여 원래의 자리를 되찾는다. 그의 기색을 살피던 정태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이만하면 됐잖아. 지금까지 내 몸도 잘 가지고 놀았잖아. 이제 풀어 ㅈ―"
"안 돼."
일레이는 정태의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전쟁도 끝났다며. 그날 네가 우리 형한테 마물까지 보냈잖아. 여기서 네 노리개 소리 듣는 것도 싫고…. 눈치 보는 것도 싫어. 24시간 내내 감시당하는 것도 불편해. 천계로 가고 싶어."
그에 굴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정태의를 싸늘하게 응시하던 일레이는 쓰고 있던 얇은테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고선 성큼 다가와 정태의의 앞에 다다랐다. 이를 빠득 가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다.
"첫날 그러고선 좀 조용하다 싶더니……."
"보내 줘."
"안 된다고 했어. 넌 아무데도 못 가, 태이."
"보내 줘."
"……정태이."
"보내 줘."
짜악―!
반복되는 말을 다시금 결연하게 읊조린 순간 살벌한 소리와 함께 정태의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왼쪽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몇 초 후에야 느껴지는 뺨이 터질 듯 화끈한 통증에 정태의는 눈을 크게 뜨고 방금 제게 일어난 일을 반추했다.
"아…. 어……."
당혹감에 넋을 놓자 입에서 뜻없는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혀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에 입술을 손등으로 훑었더니 붉은 피가 묻어 나온다. 입술이 기어코 터진 모양이었다.
이게, 뭐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당혹감이 옅어지자, 내가 여기에서 저놈한테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억울함. 그래도 나름 가깝다고 생각했던 놈이 제게 손찌검을 했다는 것에 대한 속상함. 씁쓸함, 허탈감, 외로움……. 수면 위로 떠오른 복잡한 감정들이 커다란 해일처럼 밀려 와 그를 덮쳤다.
아까 그 남자에게 들었던, 천계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보다 왠지 지금 일레이에게 따귀를 맞은 이 상황이 더 서글프게 느껴졌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맞은 뺨을 감싸쥔 채 가만히 서 있자, 일레이는 고개를 정태의에게 맞춰 숙이고는 목을 긁는 듯 위험하고 잔악한 포식자의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태이, 넌 내 권속이다."
"……."
"주제도 모르고 발칙한 말을 해 댄 것이 방금 네가 저지른 잘못이지.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천족 전용의 구속 기구로 온 몸을 묶인 채 네 침소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할 거야."
"……."
"풀어 줄 때까지 얌전히 반성하고 있어. 다음부터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야."
그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일레이의 부름에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악마들이 빠르게 들어와 정태의를 순식간에 제압해 끌고 나갔다. 저 밑까지 가라앉는 감정에 저항할 정신도, 의지도 없어진 정태의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 채 그들에게 순순히 붙잡혀 말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이동했다.
* * *
"아욱…… 으아, 윽, 흑, 흣…!"
두터운 몸이 온 체중을 실어 침대에 엎드린 정태의를 짓눌렀다. 한계까지 벌려진 구멍을 들락거리는 성기도 벅찬데 그 무게로 자신을 깔아뭉개기까지 하는 일레이에 호흡마저 어려웠다.
어떻게든 밀쳐내고 싶었지만 두 손과 두 발이 침대의 각 모서리에 묶인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태의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그저 무력하게 일레이의 밑에 깔려 그가 허리를 찍어내리는 대로 가쁜 신음을 뱉으며 흔들렸다.
자존심이 산산이 조각나서는 쏟아져 나오는 신음도 참지 못한 채 제 물건을 받아내는 정태의를 뚫을 듯 바라보며, 길고 긴 추삽질 끝에 일레이가 파정했다. 몇 번에 이어 세차게 쏟아진 물줄기가 내벽을 두드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감각이 너무나 선명해 정태의는 등근육을 움찔대며 떨었다.
"태이. 반성은 좀 했나?"
"…우, 흐으……."
"이런…. 정신 좀 차렸을 때 다시 와야겠군."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일레이는 사정을 한 뒤에도 한동안 그대로 넣고 있던 성기를 느릿하게 빼냈다. 길이가 길이인지라 내벽이 함께 딸려 올라가는 야릇한 느낌이 한참을 이어졌다.
정태의의 허벅지에서 일어나 그의 양 손발에 묶여 있던 사슬을 푼 일레이는 엎드려 있던 그를 바로 눕힌 뒤 다시 사슬을 채웠다. 시야를 가득 채운 천장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방금 전의 정사로 손가락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정태의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일레이에게 몸을 맡겼다.
잠시 기억이 끊긴 그가 저도 모르게 감겨 있던 눈을 뜨자, 막 씻고 나온 건지 머리카락이 물에 푹 젖은 그가 침대 위에 결박당해 있는 그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 담긴 생각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정태의를 내려다보던 그는 머리가 대충 마르자 몇 시간 전 방 안으로 들어왔던 그대로,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한 모습을 갖춘 채 나갔다. 자신의 처지와 명징하게 대비되는 일레이의 뒷모습을 정태의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퍽 잔인했다.
벌써 나흘째였다. 일레이는 정태의를 단단한 구속구로 묶어 방에만 처박아 놓고는 매일 찾아 와 제 성욕만을 처리하고 그대로 떠났다. 사정한 뒤에는 항상 반성은 좀 했냐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해 댔다.
힘이 다 빠져 굴욕적인 자세로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 정태의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질척한 정액을 빼내 주지도 않았다. 덕분에 정태의는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배가 아파 끙끙 앓으며 눈을 뜨는 일을 반복해서 겪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일레이에게 실망할 구석이라고는 더는 남아있지 않게 된 지 오래였지만,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조금… 아니, 사실 많이 속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해 놓고는 질릴 만큼 내벽을 문질러 짓이기고, 싸고, 뒷처리도 해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떠난다. 이게 사람을 자위 도구 취급하는 것이 아니면 뭐냔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정태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서운함과 비참함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나왔을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른 것 같았다. 아래가 참을 수 없이 찝찝했는데도 피곤을 이기진 못했는지 슬슬 졸음이 몰려와 정태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조금 뒤, 덜컥. 문이 열렸다.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 온 누군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굴을 확인해 볼까 했지만 이미 감긴 눈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잠든 척을 했다.
떨어지는 시선이 한 곳에 머무는 게 느껴진다. 얼마간 뺨 언저리를 응시한 누군가가 손로 그 부분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일레이다. 그 특유의 체온이 며칠 전 그에게 맞았던 얼굴을 살며시 쓸어내리고 있었다.
이놈은 날 그렇게 취급해 놓고 또 왜 와서 이 짓거리야. 속으로 투덜대던 정태의는 손가락으로 멍든 부분을 쿡쿡 찔러대는 그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태의가 반응을 보이자 움찔, 손장난을 멈춘 일레이는 작게 혀를 차고는 고유 마력을 불어넣어 제가 낸 상처를 치료했다.
깨끗하게 재생된 피부를 다시금 매만지던 일레이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정태의의 몸을 억압하던 사슬을 풀어주고는,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정태의의 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성적인 의도 하나 섞이지 않은 손길이 정성스레 정태의의 몸에 닿고 지나갔다. 잠시 고민하더니, 며칠 동안 빼지 않은 정액까지 손수 긁어 낸다.
이놈이 드디어 미쳐 돌았나 싶던 정태의는 그래도 아까보다 훨씬 괜찮아진 상태에 몸에서 느긋하게 힘을 풀었다. 한결 편해진 그의 표정을 기묘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일레이는, 순간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그의 입에 제 입술을 맞댔다.
부드러운 촉감이 그대로 닿아 꽤 오랬동안 입맞춤이 지속됐다. 혀를 섞지도 않고 그저 입술과 입술을 포갠 채 가만히 있는 것이, 아직 사춘기에도 접어들지 못한 어린애의 첫키스 같았다. 상대가 자는 사이에 도둑키스를 하는 일레이라니. 정태의는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지금 내가 이렇게 자는 척 깨어 있어도 되는 건가…. 자신을 그렇게 실컷 굴리고는 이제 와서 낯간지러운 행위를 해 대는 것이 원래는 짜증이 나야 할 터인데, 그런 마음이 들어야 맞는 건데. 기분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
잠깐 입술을 뗀 일레이에게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잠결에 헛것을 들은 걸로 빠르게 치부한 정태의는 여태까지처럼 죽은 듯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일레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맞춰 왔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잡아먹을 듯 퍼붓는 키스였다. 서로의 타액이 질척하게 섞이는 소리가 고요하던 방 안을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고개를 숙여 혀를 뽑을 듯 빨던 일레이의 은발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한데 엉켜 이마를 간지럽혔다. 아까까지만 해도 감정이란 게 부스러져 끔찍하기만 했던 가슴 속이, 지금은 마치 안에서 나비가 날개를 팔랑거리듯 간질거렸다.
정태의는 어느새 나사가 빠진 것 같이 뛰는 심장을 애써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 * *
방에서 풀려나자마자 지난 밤의 기억을 싸그리 잊기 위해 정태의는 발이 이끄는 대로 성 내부를 돌아다녔다.
마계에 처음 와 보는 그를 위해 만든 신비한 마계 식물들로 가득 차 있는 넓고 아름다운―정태의 전용―정원, 심심해하니 마련한 온갖 분야의 책으로 가득 찬 고즈넉한 분위기의―정태의 전용―도서관, 책을 보다가 질릴 때 바로 영화도 볼 수 있게끔 그 옆에 만들어 놓은 쾌적한―정태의 전용―시어터…….
어쩐지 돌아다닐수록 요상하게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에 정태의는 복도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거기.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
누군가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차갑게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응…? 아, 미안."
"…잠깐, 너. 이름은?"
"나? ……태의. 정태의."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순순하게 이름을 고한 정태의를, 남자는 스캔하듯 아래위로 쳐다봤다.
"……재수 없는 이름이군."
"……그 재수 없다는 게, 일레이와 관련이 있다는 말만 하지 말아 주라…."
"…하? 너, 그 이름……."
또 일레이를 떠올리고 말아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정태의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하는 백금발 남자의 이상한 중얼거림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 일레이? 이게 왜?"
"릭 그놈이 직접 말해 준 거야?"
"어……. 그렇게 부르라던데. 근데 어째 반응이 이상하다…?"
"정말 모르나 보군…."
남자는 묘한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마가 자신의 진명을 직접 고백하면, 그것을 들은 당사자는 단지 마력이나 신력을 담아 소망하는 것만으로도 그 악마를 단번에 죽일 수 있어."
"……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놈은 다른 마족들은 알아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잘난 그 이름을 왜 굳이 너 같은 천사에게 알려 준 거지?"
남자가 혼자서 떠드는 말은 중간부터는 정태의에게 거의 전달되지 못했다. 뭔가 띵― 한 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남자가 말해 준 첫 문장을 계속해서 더듬고 곱씹었다. 꼭 어젯밤처럼 기분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그의 말대로다. 정태의는 일레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제 목숨줄을 나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 놓고서. 괜시리 뜨거워지는 얼굴에 그는 벽안의 악마에게 황급히 인사를 건넨 뒤 반대쪽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당한 수모의 기억들이 점차 흐릿해졌다. 정태의는 자신이 참 호구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토록 살랑이고 벅차오르는 기분을 기껍게 여겼다. 아직 이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잘만 하면 일레이와 꽤 괜찮은 관계를 다시 이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취소다. 괜찮은 관계는 개뿔. 정태의는 입에 물린 볼개그를 콱 깨무는 것을 시도했다가 큰 아픔만 얻고 포기한 채로 열심히 일레이의 뒷담화를 깠다.
며칠 전에 처음 만나 진명에 대해 얘기해 준 남자와 정태의는 한 번 얼굴을 튼 이후로 이리저리 오가며 몇 번 마주치다가, 점점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로 얼마 전 만났을 때는 드디어 제 이름을 크리스토프라고 알려주길래 장난으로 진명이냐고 물어 보자 자신에게로 확실하게 돌아오는 답변이 없기까지 했다. 잠깐 말을 잃은 정태의가 머쓱하게 웃으며 작은 보답으로 천사의 날개를 펼쳐 보여주자 크리스는 그의 새하얀 깃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딱 그 장면을 일레이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들켰다고 해야 할 것도 없었지만 어딘가 굉장히 심기가 상한 듯한 그의 표정에 얕은 죄책감이 든 정태의였다.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정태의를 끌고 간 일레이는 아무런 말없이 그에게 볼개그를 물렸다. 정태의가 저항 한 번 못 해 보고 그의 손에 입을 막히자, 이렇게 하면 그 정신병자와 대화할 일은 없겠다는 둥의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것이 정태의가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 말을 못 하게 된 이유였다.
하여튼…. 수틀리면 뭐든지 지 맘대로 해 버리는 놈. 정태의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젓다가 번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예전,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에 우연히 일레이의 서재 책장 한 구석에 기대 있다가 무언가를 잘못 건드린 것인지 갑작스럽게 덜컹이며 옆으로 밀리는 책장 뒤로 숨겨진 통로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감도 좋군……. 거긴 들어가지 마.'
중요한 방인가, 비밀을 알았으니 죽이는 건가, 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하던 정태의에게 일레이는 별 반응 없이 짧은 몇 마디만을 건네고 더 이상 그곳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곳에 뭔가 있는 건 확실한데. 뭐가 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지. 정태의는 슬며시 고개를 드는 궁금증과 호기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장소를 다시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마침 서재의 주인은 다른 일이 있는 것인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딱딱 맞아 떨어지는 타이밍에 짧게 휘파람을 분 정태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과거의 비슷한 자세로 책장에 등을 기댄 채 몇 번 뒤척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것이 움직이며 벽 뒤로 통로가 드러났다.
예전에 일레이가 마력을 아주 미세하게 뽑아 내서 금고에 흘려넣는 방식으로 극비 문서 등을 보관하던 모습을 보면 이 안에 그렇게 중요한 게 들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한 번 더 꼬아서 아주 중요한 것을 별 거 아닌 척 보관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 설마 성 밖으로 나가는… 아니, 어쩌면 마계를 벗어날 수 있는 이동 통로이지도 모른다. 정태의는 상상만 해도 행복한 생각에 실실 웃으며 어두운 통로 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뭔가 느낌은 쎄하고 별로였지만 일레이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곳이니 충분히 의심해 볼 만했다. 지금 당장 잃을 것도 없으니 출구가 맞으면 나가는 거고, 아니라면 아쉽지만 그냥 나오면 됐다.
내가 이러는 건 너 때문이라고, 이 나쁜 놈아. 누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한다고 사람 입에 이딴 걸 채우냐. 속으로 툴툴거린 정태의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사실 이 통로가 진짜 밖으로 나가는 길이라면 천계에만 잠깐 들렀다가 재의 형의 몸상태만 확인하고 다시 일레이에게로 돌아 갈 생각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모르는 사이에 도망쳐서 이대로 관계를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예전의 정태의였다면 탈출 즉시 영영 연을 끊어버리리라 다짐하며 뒤도 안 돌아봤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정상같지 않던 일레이의 정상인 같은 면모들을 가끔이지만 하나씩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이상한 기분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나저나 형은 역시 괜찮겠지? 하긴 원래부터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고난 형이었기에 그 마물에게 얌전히 당했을 리가 없긴 했다. 그래도 얼굴은 비추긴 해야지. 오랜만에 본 동생이 입에 이딴 걸 물고 나타나면 형 표정, 꽤 볼 만하겠다. 정태의는 실없이 생각했다.
길의 형체만 겨우 보이는 어둑한 곳을 체감상 한 십 분쯤 걸었을까, 점차 밝아지던 통로는 그가 채 눈치채지도 못할 사이에 아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풀과 나무로 가득 찬 숲으로 보이는 공간 한가운데에 도달한 정태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상황을 살폈다. 나온 건가? 진짜 나온 거라고? ……그런데 여긴 그냥 숲이잖아.
특유의 내음을 풍기는 싱그러운 나무들이 우거진 숲은 어쩐지 습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 덥고, 찝찝하고…. 정태의는 입고 있던 옷이 자꾸만 달라붙는 탓에 한 손으로는 가슴팍의 천자락을 잡아 펄럭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부채질을 하며 조금이라도 더위를 덜어내고자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뭇잎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려 오더니,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무언가가 풀숲에서 놀래키듯 튀어나와 정태의의 손목을 순식간에 휘어감은 것이다.
무척추동물을 닮은 듯 흐느적거리는 괴생명체는 속이 어느 정도 비치는 반투명하고 기다란 분홍색 촉수 같은 것을 여러 개 더 꺼내더니, 빠른 속도로 정태의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읍……!"
뒷목을 간질이던 것들은 어깨를 거쳐 팔을 더듬더니 양 손목을 하나로 꽉 묶어 위로 고정했고, 두 다리를 타고 오금 안쪽으로 파고든 것들은 힘을 주고 버티는 정태의의 옷 아래 은밀한 곳을 찾아 간지럽히다가 그의 힘이 조금 풀리자 자연스럽게 다리를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푸딩과 젤리 사이의 말랑거리지만 튼튼한 촉감의 촉수들은 정태의의 온 몸에 얽혀 그를 싸매다시피 하다가, 결국 허공으로까지 띄웠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펼치려 한 날개는 촉수들에게 막혀 꺼낼 수조차 없었다.
날개를 쓰지 못해 잘못하면 땅으로 곤두박질칠까 봐 소스라치게 놀란 정태의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아까 닿았던 제 비부에 촉수의 미끌거리는 점액이 느껴지자 더욱 거세게 반항했지만 그것들은 팔다리를 조이는 데 박차를 가할 뿐 조금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악…!"
얇은 천 밑으로 고개를 들이민 촉수가 그 끝에서 정체모를 질척한 액을 흘리며 두툼한 가슴 위를 은근하게 문질러 댔다. 바짝 솟은 유두 근처를 배회하듯 맴돌다가, 모른 척 톡 건드리고 지나가는 것이 눈물 나오게 괘씸했다.
상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다리에 감긴 촉수들도 마냥 놀기만 하던 것은 아니었다. 활짝 벌려진 다리 사이에서 꺼덕대는 정태의의 성기를 뭉근하게 비비던 촉수 하나가 갑자기 몸집을 크게 부풀리더니, 그 가운데의 틈을 벌리고는 그대로 물건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큭……! 하, 아…!"
마계에 온 뒤로 앞은 쓰지도 못하고 오직 뒤만 사용하여 성적 욕구를 타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해소한 정태의에게는 그러한 종류의 자극이 퍽 오랜만이었다. 언젠가 정태의가 안은 귀여운 설탕과자 상 남자들의 내벽처럼 보드라운 촉수의 속살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그의 성기를 수축하듯 빨아들였다.
"윽……. 으…!"
왔다갔다 하며 성기에 착 달라붙은 채 정태의를 자극하는 촉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쏟아 낸 농도 짙은 정액―놀랍게도 도둑키스 사건 이후로 정태의의 구속구를 풀어 준 일레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를 강제로 덮치지 않았다―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흡수했다.
온 얼굴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정태의가 축 쳐져 있자 한참 가슴을 공략하던 위쪽의 촉수는 계속 걸리적거리던 옷들을 멋대로 쫘악 쫙 찢어 버렸다. 바깥 공기의 서늘함이 후끈한 몸에 닿자 그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저거 일레이가 사 준 옷인데……. 원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천 쪼가리들이 아래로 툭 툭 떨어졌다. 아쉬움에 하염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던 정태의의 주의를 돌린 것은 다름아닌 엉덩이 사이로 슬쩍 달라붙는 촉수였다.
다리 사이의 구멍 틈을 살짝씩 건드리며 간을 보던 얇은 촉수들은 맨 처음 파고든 하나를 시작으로 하나씩 개수를 늘려 가며 안쪽을 헤집었다. 일레이가 손가락으로 쑤셔 주는 것과는 또다른 느낌에 정태의는 눈을 질끈 감고 힘껏 몸부림쳤다. 그럴수록 촉수는 다리를 더 세게 당겨 벌릴 뿐이었다.
거부감이 절로 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레이가 자기 체액까지 써서 나름 정성스레 시간을 들여 개발해 놓은 구멍은 안을 갉작이듯 움직여 대는 촉수들에게 착실히 반응하며 조금씩 애액을 내보냈다. 젖어 들어가기 시작한 뒤에서 여러 개의 얇은 촉수들이 꾸물거리며 내부를 넓혔다.
안에서 나오는 물을 남김없이 빨아마신 촉수는 뒤가 어느 정도 눅진하게 풀리자 뽁 하는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끝났나……. 숨을 몰아쉬며 안도하던 정태의의 눈앞에 불쑥,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방금 전의 얇은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굵고 험악하게 생긴 촉수였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표면에 작은 돌기가 오돌도돌하게 박혀 있는 모양새에 겁을 먹은 그는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으응!"
안색이 파랗게 질린 정태의가 다리를 비틀었지만, 성인 남성의 팔뚝만한 그것은 아무런 전조 없이 그의 밑을 벌리고 푸욱 삽입됐다. 풀어 뒀는데도 좁아 터진 내벽 사이로 빠듯하게 들어찬 촉수가 한 번 꿈틀대자 정태의의 허리가 통 튀었다. 깊은 곳에 위치한 극점이 건드려진 탓이다.
한 번 낙폭 깊게 들어가 정태의의 약점을 찾아 낸 촉수는 바로 그곳과 맞닿는 부분을 변형시켜 조금 큰 돌기를 만든 후 빠른 속도로 구멍을 쑤걱이기 시작했다. 예민한 부분이 거칠게 후벼파지는 느낌에 정태의는 안쪽 허벅지를 덜덜 경련하며 울부짖었다.
말만 못 하게 하기 위한 재갈이라 그 크기가 크진 않았기에, 안쪽에서 울리던 신음 소리는 조금씩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으응! 하으… 응, 윽! ……하아…!"
차라리 그곳을 건들지 않고 그 주변만 쑤셔 애태워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미친 듯이 한 부분만 고집스레 쑤컹쑤컹 박아대는 감각에 정태의는 죽을 것 같은 쾌락을 느끼며 숨을 허덕였다. 약한 곳을 연속적으로 자극받아 평소보다 훨씬 이르게 사정감이 올라 온 그가 몸을 부르르 떨던 그때.
"……! 웃……?!"
발기한 성기를 갖고 놀던 촉수 끝에서 아주 얇은 촉수가 기어나와 슬금슬금 요도구 쪽으로 향하더니, 기어코 배출구를 틀어막으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짧막한 고통과 함께 얇은 것이 깊숙한 곳까지 뚫고 들어가 자리를 잡자 곧 사정하려던 것을 직전에 제지당한 물건이 터질 듯 부풀었다.
정태의는 너무 짙은 쾌감과 압박의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채로 촉수 덩어리들에게 무자비하게 범해졌다. 굵은 것이 한 차례 찌득한 액을 뱃속에 쏟아붓고 나가면 숨 돌릴 틈도 없이 중간 크기의 촉수 여러 개가 한 번에 침입해 제멋대로 안을 들쑤셔 놓았다.
"―끅, 읍…… 흡, 흣… 컥…!"
사정이 막힌 탓에 바르르 떨며 드라이로 몇 번이나 절정에 다다른 정태의는 이제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얗게 물든 머리로 정신없이 안을 찔러대는 것들을 받아내다가 이젠 정말 한계다, 아래가 터질 것 같다, 하고 생각했을 때.
"――으으응!!"
앞구멍을 빼곡하게 틀어막았던 것이 쑤욱 빠지며 그간 배출해내지 못했던 정액이 배 위로 세차게 흩뿌려졌다.
조르륵, 물 같은 것을 쏟아내는 과정은 한동안 이어졌다. 정액보다는 묽고 물보다는 점성이 있는 정체모를 액들이 움찔대는 복근 근육의 굴곡진 곳와 배꼽의 틈 안으로 흘러내리자 촉수들은 게걸스럽게 그것을 핥듯 쓸어 먹으며 흡수했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 짜내려는 건지 건들 때마다 자꾸만 울컥울컥 무언가를 뱉어 내는 성기를 그것들은 계속해서 흔들었다.
흡사 고문과도 같던 촉수들의 괴롭힘이 차차 멎자 정태의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가만히 그것들에게 제 몸을 내어 주었다. 식사가 끝났는지 아까보다 더 반질반질해진 촉수들이 기분 좋은 듯 살랑살랑 움직이며 허공에 떠 있던 정태의를 바닥으로 내려 줬다.
이제 진짜 끝인가…. 땅에 발이 닿자 긴장이 풀려 안 그래도 혼미했던 정신이 더욱 오락가락해지는 것 같았다. 한시름 놓은 그는 바닥에 옆으로 누워서 숨을 몰아쉬었다. ……일레이. 지금 당장 일레이가 보고 싶었다. 진작 그놈 말을 들을 걸. 왜 주제넘게 여기에 들어와서는……!
"……―!!"
몸에서 힘을 풀고 있던 그때, 한껏 벌려져 있다가 슬슬 닫혀 가는 구멍을 돌연 비집고 또다시 들어 오는 감각에 정태의는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야…… 이…… 양심도 없는 마물아……. 퉁퉁 부어 이젠 따갑기까지 한 눈에서 억울함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 지랄이야…!
질척이는 감촉은 똑같았지만 그보다도 아까와는 사뭇 다른 느낌에 고개를 억지로 들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확인하려 한 정태의는 제 엉덩이 밑으로 보이는 기상천외한 촉수의 모습에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달걀과 비슷한 크기의 동그란 구체들이 줄지어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모양의 촉수는 부드러운 입구를 열고 수월하게 그의 안으로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겉면이 부어 있는 점막들을 가르고 파고들자 뒷목부터 시작해 등골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머릿속에서 위험 경보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들어가면 안 될 곳까지 짓치고 머리를 들이미는 촉수에 정태의가 발끝을 발발 떨었다. 눈물과 타액으로 얼룩진 뺨 위로 방금 흘린 새 눈물이 투명한 길을 만들었다.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뒤를 꿰뚫린 그 압박감이 너무 심해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 떴는데 성 안의 제 안락한 침대 위에 누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이게 다 지독한 악몽이었으면. 정태의는 다 풀린 눈으로 아랫배를 덜덜 경련하면서 생각했다. 문득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지금 저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살다살다 환각도 다 겪어 보네…….
"―정태이!"
……어? 순간 귀에 내리꽂히는 그리운 목소리에 정태의는 반쯤 풀린 눈을 부릅떴다.
환각 따위가 아니었다. 저 멀리서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일레이가 처음 보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접어 올린 소매 아래로 굵은 핏줄이 불거진 팔뚝이 보였다. 주름 하나 없이 잘 다려져 있던 셔츠는 다 구겨지고, 느슨하게 풀어헤친 넥타이가 바람에 휘날린다.
"태이! 너…!"
쓰러져 있던 정태의의 앞에 다다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일레이는 답지않게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그가 아직까지 물고 있던 볼개그를 빼냈다. 틀어막고 있던 것이 사라지자 입 안에 한가득 고여 있던 침이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일레이……. 정말 일레이야…?"
입이 자유를 되찾자마자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제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고는 자신의 허리에 팔을 감아오며 매달리는 정태의를 일레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바닥에 어지럽게 홑어진 옷 조각들과 푹 젖은 나신 상태의 그, 그리고 무엇보다 일레이를 발견하자마자 구석으로 도망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촉수종을 보니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안 봐도 뻔히 그려졌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아직까지 정태의의 뒤에 박혀 있는 울퉁불퉁한 촉수였다.
"…태이. 대체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야."
일레이는 쯧 혀를 차며 큰 손으로 정태의의 뒤에 꽂힌 촉수를 움켜잡고는 예고도 없이 뒤로 훅, 빼냈다.
"――아아아!! 아…! 으아……!"
드르르륵―, 촉수의 튀어나온 부분들이 퉁퉁 부은 전립선을 연속적으로 자극하며 순식간에 빠져나가자 정태의는 상체를 후드득 무너뜨리며 비명 같은 신음을 토해 냈다. 촉수를 빼냈음에도 불구하고 볼록한 아랫배를 꾹꾹 눌러 보던 일레이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산란을 마쳤군."
"아읏… 산란…? 그게 무슨, 알…? 어… 어떻게 해……."
"낳아야지, 태이."
안에 든 걸 빼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그의 입에서 사형 선고와도 같은 말이 떨어지자 정태의는 쩡 얼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조금만 참으면 돼, 태이. 일레이가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과는 달리 힘이 들어간 팔로 그의 골반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엎드린 상태에서 엉덩이만 위로 뺀 자세가 된 정태의의 아랫배를 한 손으로 꾸욱 누르자 반항은 더욱 심해졌다. 안에 자리잡은 알들이 예민한 곳을 건드리는지 애원 섞인 신음을 마구 터뜨렸다.
"아랫배에 힘 줘."
"응, 아, 못 하겠어…. 흐어엉, 나 못 하겠어 일레이……."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네가 위험해질 걸. 눌러 줄 테니 어서."
"히끅, 흡, 아아윽…!"
일레이의 말에 덜컥 겁이 난 정태의는 서럽게 훌쩍거리면서도 천천히 아랫배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안의 것을 밀어낸다는 느낌으로 끙끙거리자 배에 부드럽고 따뜻한 일레이의 손이 닿아 살살 문질러 줬다.
"윽, 으윽… 우읏!"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뽀옥, 하고 아기 주먹만 한 알 하나가 구멍을 벌리며 겨우 빠져나왔다. 고작 한 개의 알만 꺼냈는데도 기진맥진해진 정태의가 치욕스러움에 엉덩이를 내리자 일레이는 그의 한쪽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달래듯 두드리며 재촉했다.
두 개, 세 개, 네 개……. 조그만 공이 뒤를 통해 밖으로 배출되는 느낌은 익숙할 듯 생경했고, 또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이런 모습을 남 앞에서 전부 내보이기까지 하니 정태의는 한도를 초과한 수치감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걸 또 어떻게 알아챘는지 손으로 눈가를 쓸어 주는 일레이의 익숙지 않은 상냥한 구석에 몸서리친 그가 나머지 알을 꺼내려 다시 힘을 줬을 때였다.
"…어…?"
"태이.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안 나와…. 이거, 어떡……!"
마지막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알 하나가 깊은 곳까지 박힌 건지 아무리 힘을 줘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어쩔 줄 몰라하는 정태의를 토닥이며 다독여 준 일레이는 접어 올린 소매를 더 위로 당기더니, 벌름대는 구멍 안으로 손가락들을 한 번에 밀어넣기 시작했다.
"아흐윽!! 너, 지금 뭐 하는, 흑! 아, 빼애, 빼!"
"그럼 계속 여기에 품고 있을 건가? 부화할 때까지?"
"으으응, 아윽! 아, 아 싫어…! 윽, 제발 그만……."
"그건 안 돼, 태이. 내 권속이 고작 촉수종의 숙주가 되어 죽기라도 한다면 굉장히 슬플 것 같거든."
보통 사람들보다도 훨씬 커다란 크기의 손이 제 몸속으로 전부 들어가 모습을 감추자 머리가 핑핑 돌고 눈앞이 번쩍이는 정태의였다. 감전당한 듯 몸을 바르르 떨며 침을 줄줄 흘리면서도 그의 내벽은 쫀득하게 일레이의 손에 달라붙어 조여댔다.
이러다 정말 몸이 망가질 것 같다며 울고불고 버둥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달래던 일레이는 안쪽의 알에 손이 닿을 때까지 밀어넣었다.
한참 동안 알아듣지 못할 교성을 내지르던 정태의는 필사적으로 그의 팔뚝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다가 어느 순간 전신을 형편없이 떨며 경련하더니, 이내 까무룩 혼절했다.
그가 정신을 잃고 늘어지자마자 그럭저럭 유순하게 풀리는 안쪽에 일레이는 빠르게 움직여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있던 촉수종의 마지막 알을 쥔 채로 손을 빼냈다. 그리고는 제 겉옷을 벗어 바닥에 누운 정태의를 감싸 안아올렸다.
그를 품에 안은 채 바닥에 굴러다니는 다섯 개의 알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던 일레이의 시선이 벌벌 떠는 촉수종에게로 옮겨 갔다.
지은 죄를 아는지 몸을 웅크리고 있는 마물의 주위로 스멀스멀 저주와도 같은 검은 마력이 모여들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겪어본 적 없는 두려움이 앞서는, 마계의 정점에 서 있는 악마에게 걸맞는 힘이었다.
"누구의 것인지 뻔히 보이는 것을……."
키에에엑―!
곧이어 어리석은 마물의 몸체 사이사이를 가르고 들어간 그의 마력은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처절한 고통을 선사했다. 울부짖으며 몸뚱이를 기괴하게 뒤틀다가, 악취가 나는 액을 왈칵 쏟아냈다. 방금 전까지 멀쩡히 살아 있던 것은 어느새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무기물 덩어리가 되어 천천히 소멸해 가고 있었다.
숲 안에서 아찔하게 울려퍼진 촉수종의 죽기 전 마지막 단말마는 메아리치듯 몇 번을 반복됐다. 그 소름 끼치는 울림을 들으며, 멀리서 저마다 정태의를 노리던 다른 마물들은 공포에 떨며 약속이라도 한 듯 흩어져 버렸다.
* * *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더군, 정태이.'
이건 뭔가 잘못됐다. 정태의는 생각했다.
'조금 풀어 줬더니 아주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어.'
촉수에게 당했을 때 흐려져 가는 의식 사이에서 봤던 다정한 모습은 어디 가고, 미치광이같이 풀린 동공을 바싹 좁힌 일레이가 낮게 읊조리던 소름 끼치는 음성이 아직까지 선명했다. 그는 정태의의 몸이 다 회복되기도 전에 제 고유 마력까지 써서 몸을 칭칭 감는 속박술 같은 것을 걸고는 사라져 버렸다.
'너는 아픈 걸 싫어했지, 태이. 억지로 이 결박을 풀려고 한다면 버틸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르게 될 거다. 게다가 신력도 못 쓰니, 제때 치유하지 못해 과다 출혈로 죽고 말겠군.'
'으읍…! 읍! 우으…….'
아니,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이러는 이유라도 좀 알자. 이렇게 화가 났었으면서 그때 그 숲에서는 어떻게 참았던 거야.
'넌 말할 필요도, 움직일 필요도 없어 태이. 도망이나 천계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긴 시간 동안 꼼짝도 못 하고 감금되어 있어야 정신을 차리겠나? 그래… 그게 좋겠군. 마침 귀찮은 일도 겹쳤으니 말이야.'
'으으웁!'
도망친 게 아니라 거기 네놈 집무실이었다. 그리고 밖으로 가는 길이 맞았더라도 다시 여기로 돌아오려 했다고. 제발 입에 물린 것 좀 다시 빼 주라. 들어야 할 말을 못 들으니 계속 오해만 쌓이잖아. 속으로 열심히 따졌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정태의의 호소 어린 눈빛은 끝내 그에게 닿지 못했었다.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여기 얌전히 박혀 있어. 네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나에게 보고된다는 사실도 알 테니 더 이상 달아나려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서슬 퍼런 목소리에 분노를 꾹꾹 눌러담아 통보했던 일레이가 정말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 자리를 비운 지 벌써 일 주일이 지났다. 방으로 전해지는 식사 대용 주사를 맞으며―그렇게 괘씸했던 건지 이젠 밥도 안 줬다―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이 방에 갇힌 지 일 주일이 지났다는 뜻이다.
그가 떠나기 전 걸어놓고 간 구속은 효과가 또 얼마나 좋은지, 정태의가 방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날카로운 날붙이가 피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태의는 일레이가 자신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는 설마 하는 마음가짐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주변 악마들이 일레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접하고 보이는 반응을 겪을수록 인정해야만 했다. 표현 방식이 많이 비뚤어졌지만 그는 나름대로 제게 호감을 표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여러 번 깊게 생각을 해 봐도, 정태의 자신은 지금 일레이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그가 그렇게 밉지 않았다.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며 마음에 입은 상처는 생각지도 못한 그의 사과에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렸고, 물건에 대한 소유욕만을 자신에게 내보이고 있다고 생각해 우울했던 때의 감정은 예상하기도 어려운 그의 의외성에 찌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렸다.
하지만 일레이의 곁에 남아서 그의 정상인 같은 면모를 조금 더 지켜보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천마전쟁이 발발된 날부터 몇 달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 형과 삼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천계에서 버림받았다고 해도 몇 없는 가족을 보기 위해서는 꼭 한 번은 들러야 했다.
아. 어쩌면 일레이가 없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생각의 나열 끝에 정태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픈 게 싫은 건 맞지만, 언젠가 꼭 해야 할 일에 다가가기 위한 기회가 눈앞에 있다면 어쨌든 감내해야 했다. 혹여나 그가 더 강력한 속박 기술로 자신을 묶어 둔다면 나가는 것은 정말 불가능해질 터였다.
그는 손목, 발목에 감겨 다리와 팔을 단단히 억압하고 있는 구속구에서 흘러 나오는 마력의 흐름을 눈으로 훑었다. 단지 탈출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뿐인데도 엄청나게 따끔거리는 감각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래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됐다. 보는 눈이 많으니 자신이 이것을 풀고 밖으로 나간다면 바로 일레이에게 보고가 갈 게 뻔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날아서 마계를 빠져나가는 수밖에.
분명 이것들을 해제하면 그 여파로 이 방은 물론 주변 구조물들까지 전부 부숴질 것이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정태의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고 돌려 본 뒤 단단히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고 마력의 농도가 가장 짙은 부분을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벌써부터 손바닥이 저릿저릿했지만 입술을 꽉 물고, 거세게 당겼다.
파직―! 파지지직―!!
잡은 곳에 힘을 가하자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나며 이리저리 스파크가 튀었다. 아픔이 뒤따를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칼로 온 몸을 난도질 당하는 것처럼 죽을 듯이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다.
구속은 역시나 쉽게 끊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폐부는 터질 듯 아렸고, 몸 안에서 끊임없이 돌던 피는 안에서 역류할 듯 요동쳤다. ―정태이, 헛짓거리 하지 마. 짓씹듯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울컥, 입에서 핏덩어리를 토해내기까지 한 정태의의 주위는 삽시간에 엉망이 됐다. 그래도 그는 구속구를 잡아당기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몰아닥치는 고통을 감당하기가 점점 힘들었지만 이미 시작한 것을 지금 포기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그를 붙잡듯 검은 기을 뿜는 일레이의 마력과 정태의가 계속해서 치열하게 대치했다. 살을 가르고 나온 피가 그의 흰 옷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천자락에 채 스미지 못한 선혈은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가 쪼그라드는 듯 지옥 같은 아픔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도는 심해졌다.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오로지 통각만으로 다가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은 괴로움으로 다가올 때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이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몸을 묶고 있던 사슬들이 터지듯 풀려 그의 몸에서 나가떨어졌다.
"커흑!! 끄윽…… 하아, 읍…!"
돼, 됐다…….
구속구의 폭발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 난장판이 된 방을 남겨두고, 정태의는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다리를 겨우 일으켜 성 밖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파편에 한쪽 다리를 맞은 건지 움직이기가 영 불편했다. 제 방에서 그렇게 요란한 소리가 났으니 감시자들이 제 부재를 알아채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죽을 것만 같던 고통은 그나마 잠잠해졌지만 이미 몸에 새겨진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는 것이 멈추질 않았다. 절뚝이며 최대한 속도를 내서 걷다가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 다다르자 정태의는 등 뒤의 위쪽 부분에서 새하얀 날개를 꺼내 펼쳤다.
어쩌다가 다친 건지 싸한 통증이 어깨 바로 밑에서도 느껴졌지만 하늘을 날 수만 있다면 조금 타박상을 입은 것쯤이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좌우로 활짝 편 날개를 한 번 가볍게 펄럭였을 때.
"――아윽!"
아찔한 고통이 날갯죽지를 찔렀다.
젠장, 안 돼. 이제 와서 이러면……! 난 일레이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천계에 갔다 와야 한단 말이다…!
이를 악물고 날개를 더 힘껏 움직였지만 날갯죽지를 다친 채로 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레이가 건 속박을 겨우 풀고선 아직 뭘 해 본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꼬인 작금의 상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좌절스러웠다.
"저기 있다! 잡아라!!"
"리그로우 님의 명이다. 저 천사를 생포하라! 상처 하나 있어서는 안 된…… 헉."
"정태이 씨, 대체 무슨 일이…!"
더군다나 사태를 파악한 악마들에게 위치를 들키기까지 했다. 피범벅인 저를 보고 혼비백산해서는 떼를 지어 달려오고 있는 악마들에게 마냥 순순히 잡혀 줄 수만은 없었기에 정태의는 성치 않은 다리를 온 힘을 다해 움직여 조금이나마 앞을 향해 뛰었다.
많은 악마들이 돌아다니는 거리로 나오자 수많은 시선들이 한 몸에 꽂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지척에서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 왔다. 귀를 기울일 정신도 없어 정면만 보고 내달리던 정태의의 바로 앞 공간이 괴이한 모양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낌새에 정태의는 달리던 방향을 틀었다.
구우우웅――!
끼긱, 키기긱. 깨진 유리처럼 쩌적이는 소리를 내며 까맣게 금이 가던 허공은 이내 위아래로 길게 갈라져 그 틈을 점점 넓혀 갔다. 그 사이로, 정태의가 익히 아는 악마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일레이 리그로우. 그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원의 벽을 접고 찢어 자신에게로 한달음에 달려 온 것이었다.
"정태이!"
일레이는 거친 목소리로 고함치며 정태의의 이름을 불렀다. 표정 없는 싸늘한 얼굴이 정태의를 마주본다. 그의 벼락 같은 음성을 들은 정태의의 움직임이 멎었다. 머리부터 발 끝, 새하얀 날개와 걸치고 있는 옷까지 전부 피칠갑을 한 채로 숨을 몰아쉬는 그를, 심연을 담은 검은 눈이 직시했다.
"태이. 이리 와."
노기어린 나직한 목소리가 한 번 더 그를 호명했다. 으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야생의 것과 닮아 있었다.
보아하니 지금 잡힌다면 정말 저 손에 어떻게든 끝장이 날 것 같았다. 입이 막혀 있어서 해명 따위를 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니, 솔직히 이 상황에서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납득시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뇌를 잠식했다. 가슴 안에서 쿵, 쿵, 거세게 박동해대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눈 앞이 아찔해지고, 정신은 공포로 돌아버릴 지경이다.
앞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일레이, 뒤는 그가 거느리는 수많은 악마 군단.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는 악마들 중에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절망적인 현실에 한탄하던 그는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비틀린 시선이 한 순간도 깜빡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한가득 고인 식은땀이 소름이 쭈뼛 돋은 등줄기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주춤, 한 발을 뒤로 내뻗었다.
그 1초도 되지 않는 짧디 짧은 순간.
일레이가 이성을 잃은 눈으로 미친 듯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나온 그의 등 뒤로, 깨진 공간의 균열이 그 찰나 정태의의 시야에 잡혔다. 그래, 저기로 들어가서 어느 곳이든 여기를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제길, 정태의―!"
격양된 목소리가 정확한 발음으로 정태의를 불렀다. 정태의는 이를 빠득 갈고는 남은 힘을 짜내 땅을 박차고 도약하며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어딘가 다급한 기색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흘긋 뒤를 돌아봤다.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자리에 허망하게 서 있는 일레이의 얼굴이 보인다.
차원의 틈으로 날아오르던 정태의의 눈이 흠칫, 크게 뜨였다. 그 여유롭던 얼굴에서 발견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초조함, 낭패감. 그리고 절박함…….
……뭐야. 이게 뭐냐고.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떤 고통을 이겨내고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네가 그러면 떠나기 싫어지잖아.
여기저기 뒤틀려 있던 균열들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거의 다 수복된 바람에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탈출구를 코앞에 두고, 정태의의 날갯짓이 속도를 줄였다. 몸도 이젠 한계에 다다랐는지 시야가 껌뻑, 껌뻑, 점멸한다. 불현듯 허리 아래로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불쑥 들어와 감겼다.
"못 가, 태이."
그가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곧이어 목 뒤에 찾아 온 아뜩한 고통.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강력하고 정확하게 급소를 내리치는 손날에, 정태의는 무너지듯 정신을 잃었다.
* * *
눈을 감았다 떴다. 김이 서린 듯 희끄무레한 시야에 누군가의 상반신이 조금씩 흔들린다.
퍽, 퍼억, 찔걱, 퍽. 물에 잠긴 듯 먹먹하기만 했던 알 수 없는 질척한 소리들이 서서히 선명함을 되찾았다.
"우읍… 하아……."
"태이. 정신이 좀 드나?"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시각, 청각에 이어 촉각까지 깨우는 듯 했다. 커다랗고 뜨거운 것이 뒤에 콱 박혀 몸이 두 개로 갈라질 것 같은 아픔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흉포하게 부푼 살덩이에 꼬치처럼 꿰인 내벽이 화상을 입은 듯 쓰라렸다.
잃었던 오감이 천천히 되돌아오자 대충 상황 파악이 된다. 일레이 이 미친 새끼, 아무리 수틀렸다고 해도 그 끔찍한 크기를 자기 정액 없이 쑤셔넣다니.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기막힌 광경에 정태의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은 입 안을 가득 메운 볼개그에 막혀 도로 들어갔다.
"끄윽……."
"그러게 누가 나 없을 때 도망가랬나. 응?"
아니야, 아니라고! 너에게서 영영 도망치려던 게 아니란 말이다…! 정태의는 재갈이 물린 입 사이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소리는 막힌 듯한 신음소리가 되어 무의미하게 밖으로 흘러나갔을 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지 못했다.
"움… 읍……!"
"아파, 태이?"
차오른 눈물 때문에 그렁거리는 정태의의 두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쉴 새 없이 허릿짓을 하고 있는 일레이를 쏘아보았다. 아프냐는 물음에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고였던 눈물이 기어이 넘쳐 양 뺨 위로 흘러내렸다. 게다가 날개를 펼치고 누운 건지 딱딱한 뼈에 눌리는 등과 어깨가 무척이나 저렸다.
"끄읍, 흑…."
"울어? 이런……. 울지 마, 태이. 벌써부터 울면 안 되지."
내일도, 모레도, 낮과 밤이 몇 번이나 뒤바뀌어도. 눈이 불어 터지도록 계속해서 울어야 할 텐데. 지금부터 그렇게 눈물을 쏟으면 나중 가서 네가 곤란해, 태이.
입꼬리를 틀어올린 일레이가 즐거운 듯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불기둥 같은 성기로 풀리지도 않은 안쪽을 계속해서 들쑤신다. 한 번 짓치고 들어올 때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통에 정태의가 몸을 뒤틀자 일레이는 그의 머리채를 한 손에 휘어잡았다.
그러고선 주체하지 못한 분노를 목소리에 담아내듯 으르렁거렸다.
"벌거벗겨서 마물들의 소굴에 던져 줘야 정신을 차리고 내 곁에 있을 건가."
듣기만 해도 가슴 속이 덜덜 떨렸다. 칼날이 박힌 듯한 읊조림에 살갗이 그대로 베이는 듯 했다.
"아니면 다시는 자의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이 날개를 분질러 버릴까."
침대에 깔린 정태의의 날갯죽지를 우악스럽게 꺾어 잡은 그가 첨예하게 날이 서린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뼛속까지 사무치는 공포심에 서럽게 흔들리는 눈을 겨우 떠 그를 꾸역꾸역 마주보자 또 어디에서 버튼이 눌린 건지 추삽질의 속도가 확 높아졌다.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굵은 수갑을 찬 손목이 가슴께에서 비참하게 흔들렸다.
"결국엔 잡힐 걸 아는 놈이 왜 자꾸 도망칠 궁리를 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웁… 흐윽……."
아니라고. 아니라고! 너 없는 사이에 금방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오려고 했단 말이야. 제발 사람 말 좀 들어!
정태의의 간절한 눈빛을 읽어 냈는지, 일레이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허덕이던 숨을 몰아쉬는 정태의를 보는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나?"
한 줄기의 빛처럼 들려오는 일레이의 물음에 아래의 압박감을 견뎌내려 꼭 감았던 정태의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그 꼴을 보더니 흐음,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발, 부탁이다 일레이. 말 좀 하게 해 줘. 왜 나가려 했는지 다 설명할 테니까…!
"싫어."
지금은 널 벌주는 게 먼저거든.
"…――!"
미친놈. 정신 나간 놈. 말 그대로 울화통이 터진다. 정태의는 휘발되기 직전인 정신줄을 붙잡고 항의하듯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다시금 시작된 허릿짓에 속절없이 고개를 베개에 파묻고는 결박된 손으로 일레이의 가슴을 밀어내기에 바빴다.
그나마 조금씩 안이 젖어들기 시작한 탓에 아까처럼 뻑뻑한 느낌은 사그라들었지만, 들쑤시는 과정이 조금 쉬워졌을 뿐 여전히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숨이 차서 두통이 일고 눈앞이 흐려졌다. 정태의는 조금이나마 일레이의 곁에 남아있고 싶다고 생각한 과거의 자신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말했지, 태이. 넌 내 권속이라고. 내 것이라고. 그런데,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네 마음대로 튀어 버리시겠다? ―정신 나갔군."
말하면서 점점 더 화가 치미는지, 그는 한결 더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그러면서 속에 처박힌 몽둥이 같은 것은 몸집을 점점 더 키워 나간다.
물건을 품느라 한계까지 벌려졌다고 생각했던 구멍이 점점 더 늘어났다. 그 괴물 같은 부피가 배꼽 위까지 침입하자 내장이 온통 위로 밀리는 듯 숨이 막혔다.
"흐읍, 끄윽… 후응……."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한 정태의는 결국 애처럼 흐느꼈다. 혼자 오해하고 착각해 사람을 이토록 몰아붙이는 일레이가 미웠다. 입에 문 재갈에 막혀 변명조차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분하고, 또 서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상으로 섹스를 이어간다면 정말 뒤가 찢어질 것 같았다. 오히려 여태까지 아래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답도 없는 상황을 종결하려면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눈앞의 미치광이는 재갈을 풀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끄흥… 히끅, 흐으……."
정태의는 그렁거리는 눈을 들어 잡아먹을 것처럼 그를 응시하던 일레이와 시선을 맞췄다. 서로의 눈빛이 허공에서 한참 동안 얽히고설켰다. 흠뻑 젖은 눈꺼풀을 깜빡이자 또륵, 눈물 한 방울이 말라붙은 뺨 위를 가로질러 흘러내린다.
그와 동시에 정태의는 하나로 묶인 손목을 천천히 들어 올려 일레이의 목 뒤를 감싸 안았다. 마치 그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그 상태 그대로, 틀어막고 있는 것 때문에 살짝 열린 입술을 그의 입가에 대고 비볐다.
그러자 대단히 희한한 상황이라도 접한 듯 일레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털어대던 허리를 멈추고 몸을 굳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곧이어 정태의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헤아려 보던 얼굴이 차차 일그러졌다.
"태이. 누구한테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레이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정태의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부딪혔다. 이번엔 입 주변이 아니라 정확히 입술 한가운데였다. 정태의의 발칙한 행동에 의해 입을 막힌 일레이가 낮게 침음했다. 순간 안에서 무언가가 팍 터져 나왔다. 울컥, 울컥 쏟아지는 최음 성분 하나 섞이지 않은 정액이 밑을 채웠다.
파정이 차차 멎자 허리를 몇 번 치대듯 움직이던 그는 정태의의 얄쌍한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올린 다음 제 골반 뒤에 앉혔다. 물론 연결된 아래는 빼지 않은 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주저하던 흰 손이 정태의의 뒤통수에 위치한 재갈의 연결 장치를 달칵, 풀었다.
"우읍…! 하아, 난 천계로―!"
"아직. 쉿……."
"웁! 우웁…!"
"먼저 말하도록 해. 정태의 네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일레이 리그로우의 것이라고. 넌 한 번 약속한 건 지키는 편이니. 네 입으로 직접 말한다면, 그때 변명할 수 있게 해 주지."
정태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곧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제 입에 손가락을 처넣고 있는 일레이를 의아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고작 그 말 한 마디가 뭘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건지. 예전부터 제 권속이라느니 하는 말은 쭉 들어 왔지만 이 정도로 소유욕에 점칠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 그런 선언쯤이야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나를 위해, 얼마든지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레이는 제게로 쏟아지는 그의 시선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오직 정태의의 얼굴에 고정되어 음산하게 번들거리는 한색의 눈은 반쯤 미친 것처럼 풀려 있었다.
"……말하기 싫다? 좋아. 이대로 쭉 다시 가 보자는 거지. 시간은 많고, 나도 바쁠 것 없거든."
"……!"
말을 끝맺는 순간 허리를 커다랗게 추어올리는 일레이에, 정태의는 소리 없이 몸을 비틀었다.
목구멍 안에서 나갈 기회를 노리던 비명은 길쭉하고 굵은 손가락에 틀어막혀 다시 안으로 삼켜졌다. 일레이 위에서 인형처럼 흔들리던 정태의는 있는 힘껏 도리질치며 눈물을 뚝뚝 떨궜다. 성기 바로 위에 앉아 체중까지 더해지는 자세 탓인지 아까보다 더욱 깊숙한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성기가 버거웠다.
"태이. ……넌 내 거다. ……내 거야."
몸 속을 빠듯하게 채운 성기가 한 번 쑤시고 지나갈 때마다 일레이는 내가 자신의 것이라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해 댔다. 이대로는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성치 않은 몸으로 저 거대한 물건까지 받아내고 있으려니 이대로 콱 숨을 거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내벽이 흘려보낸 애액과 일레이의 정액이 뒤섞여 한껏 축축해진 밑은 그가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찰박이는 물소리를 냈다. 살갗이 마찰할 때마다 홧홧한 느낌과 함께 엉겨붙은 정액이 하얗게 거품을 내며 밖으로 밀려 나왔다.
일레이의 목을 수갑 찬 손으로 감은 채 그의 움직임에 맞춰 신음하던 정태의는 한순간 눈을 감았다. 이대로 그냥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허리를 계속해서 쳐올리며, 일레이는 제 가슴팍에 기대 축 늘어진 그의 머리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 넣은 손가락을 슬며시 뺐다.
"지금은 말할 생각이 드나?"
그것은 마치 악마의 유혹 같은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정태의가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자 일레이는 그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는 살짝 들어올렸다가, 고환까지 구멍 안으로 후벼넣을 듯 거세게 밑으로 내려앉혔다.
그 숨막히는 고통에 두 눈을 부릅뜬 정태의는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미세하지만 아래위로 살짝씩 움직이는 고개를 확인한 일레이는 그의 하관을 붙잡고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
그러나 얼마나 울어댔는지 목이 메여 목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아무런 말 없이 낑낑거리자 일레이는 그의 얼굴 아랫부분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에 움칫 놀란 정태의가 얼른 입을 열었다.
"…―거다. ……니까, ……해."
형편없이 메말라 비틀어진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몇 마디를 간신히 입 밖으로 내었다. 일레이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정태의의 갈라진 입술에 제 입술을 부드럽게 맞댔다.
"다시. 내게 제대로 들리도록."
"…는, 네 거라고. …―네 거란 말야, 이 …―끼야……."
"다시. 이름까지 제대로 들리게. 내게는 들리지 않았어."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분통이 터졌다. 얄미운 말만 쏙쏙 골라 내뱉는 일레이의 입을 노려보다가, 온 힘을 다해 그의 입술을 콱 깨물고는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일레이 리그로우……, 정태의는 일레이 네놈 거란 말이다. 죽이든 말든 맘대로 해!"
분홍색 입술의 얇은 피부는 단단한 이에 의해 쉽게 찢어졌다. 그 사이로 흐르는 붉은 피가 일레이의 턱을 타고 흘렀지만, 그는 물린 순간에만 잠깐 멈칫했을 뿐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눈까지 휘어가며 미소지었다.
정태의는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보는 천진한 소년 같은 웃음이다. 곧 크게 소리를 내서 웃을 것 같은, 어울리지 않게 환하고 밝은.
아, 또 이 기분이다. 가슴 속이 뜨끔한 것이……. 어쩌면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아마…….
"또 도망칠 건가?"
"―야. 나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닐까."
그것은 몹시도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웃음기가 살짝 어린 진지한 물음에 전혀 상관도 없는 대답을 한 것은. 정태의는 순간 뜨거워지는 낯에 일레이의 목에 둘렀던 팔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팔을 붙잡아 다시 제 목에 건 눈앞에 있는 그였다.
"…태이. 빌어먹을……. 태이."
일레이는 낮게 신음하듯 읊조렸다. 그리고는 혼자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천사를 부술 듯 힘껏 끌어안았다. 정태의 모르게, 그의 등 뒤에서 긴장한 듯 움찔대는 새하얀 날개를 음산한 눈빛으로 응시한 채.
제가 뱉은 말의 여파로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몰라하던 정태의가 돌연 허리를 퍼뜩 떨며 놀랐다. 아직까지 안에 들어 있던 살덩이가 다시금 힘을 받고 부푼 탓이다. 이, 미친…! 스스로 불러온 재앙 같은 상황에 그가 울상을 지었다.
"…―짓말이라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게 중얼거린 일레이가 슬슬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단 조금 덜한 고통과 함께, 안쪽에서 무언가가 간질거리는 듯한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는 자신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고, 주륵주륵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따뜻한 손길이 한없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내가 미친 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 악마를 보며 다정한 면모를 찾고 있다니. 사실은 이런 인간성 있는 모습을 보고 그의 곁에 남아 있겠다고 마음먹었던 거지만.
"……태이. ……태이."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간절해 보인다면, 내 머리가 정녕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돌아버린 걸까. 미친 듯이 허리를 놀리는 일레이에 의해 푹 절어 온통 들썩이는 몸으로 정태의는 생각했다.
그리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 괜히 봤다. 뿌연 시야에 결코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이고 있었다.
아마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땀에 젖고 욕망에 절은 채 정태의를 마주보고 있는 얼굴에는 정태의가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던 그의 정상인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발갛게 물든 눈가, 조심스레 닿아오는 손길, 흥분에 겨워 내뱉는 숨결…….
그 노골적인 호소들이 나타내는 것은 명백했다. 모를 재간이 없었다.
정태의는 전혀 긴장을 놓을 상황이 아닌데도 포근하게 풀어지는 마음에, 일레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빠듯하게 차오르는 가슴 속이 전례 없이 빠르게 박동했다.
그래, 이제는 인정하자. 나는, 일레이를……. 그리고 아마 그도, 나를…….
마음을 자각함과 동시에, 간질거리던 안쪽은 점차 정태의가 잘 알고 있는 감각으로 변해 갔다. 어느 순간부터 입에서 새어 나오는 달뜬 외마디 소리는 틀림없이 자신의 목소리였다. 정태의는 뜨거워지는 머리를 일레이의 어깨에 파묻었다. 목을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줘서 그를 빈틈없이 껴안았다.
저 멀리 보이던 새하얀 빛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일레이의 큼지막한 귀두가 같은 곳을 계속해서 쑤시듯 자극했다. 머릿속이 아찔해져 정신없이 그에게 매달려 울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 흐, ――…!"
몸이 확 쏠리는 감각과 함께 손끝 발끝이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저릿해졌다. 잔뜩 힘이 들어가 수축하는 내벽이 일레이의 물건을 빠듯하게 물고 놔 주지 않았다. 달달 떨면서 뒤로만 가는 쾌락의 여운을 느끼던 정태의를 홀린 듯 바라보던 일레이의 동공이 일순 확장되었다.
"일레이…. 좋아……. 좋아……."
열에 달뜬 목소리가 귀를 간질임과 거의 동시에, 천사의 뒤에서 살랑거리는 날개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목 아래 어깨 옆, 날개가 육체와 이어지는 경계를 덮은 깃부터, 하나씩 검게 변해 간다. 때묻지 않은 신성한 흰 깃털들은 마치 하얀색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듯 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순흑으로 물들었다. 가운데의 날개덮깃이 변화를 마치자 그와 연결된 다른 날개깃들까지 전부 색을 반전시켰다.
"좋아……. 일레이."
다음 순간, 정태의의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세찬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며 잔뜩 풀어진 내벽을 두드렸다. 예민해져 있는 곳을 약하게나마 자극받은 탓에 어깨를 움츠린 정태의는 일레이의 시선이 멍하니 향해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것은 일레이의 흑안과 같은 검정으로 채색된 자신의 날개. 그 순간 정태의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아, 난 이제 꼼짝없이 평생 동안 저놈을 건사하면서 살 수밖에 없겠구나.
"……내 거다, 태이."
고양된 어조로 내뱉은 일레이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물고 빨았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결국 타락해버린 그의 천사를 정신없이 탐했다. 곧이어 찔걱이는 물소리와 다 쉰 신음 소리가 다시 한 번 방 안을 채웠다.
일레이는 제 손 안에 들어온 자기만의 천사를 이젠 영영 놓아주지 않을 터였다.
* * *
"아오 진짜 미치겠네. 정태의 이 멍청한 놈이…! 어쩌다가 마계까지 잡혀 들어가서는……."
김정필은 분에 못 이겨 옆에 있던 기둥을 발로 격하게 차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헤집었다. 방금 전 높으신 분들에게 직접 면담을 청해 정태의 구출 작전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자마자 시원하게 반려당한 그는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천사 군단에 속해 있던 천계 전력의 일부라고 해도, 이제는 일반 계급이 된 천사 하나를 납치하듯 데려가 종전을 부추키던 마계나, 그 영문모를 제안을 덥썩 물고 종전을 택한 천계나. 다들 미친 것 같았다.
"이 새끼는 갑자기 계급도 내려놓고선 대체 뭔 짓을 하고 싸돌아다니는 거야."
하지만 그런 말을 내밷으면서도, 남들과 어울려 평범하게 군생활을 하던 정태의가 갑작스레 능천사의 계급을 버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김정필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정태의에게 갑자기 일반 계급이 된 이유가 뭐냐고 물어도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민망하게 웃어넘기는 까닭까지.
"주먹다짐 한 번 했다고 토끼긴……."
저가 기억하는 바로는, 분명 시작은 꽤 괜찮았다. 그들은 원래 그럭저럭 사이가 좋았었다. 전우애를 강조하는 군대 특성상 거의 모든 상황에서 함께 행동했고, 그에 따라 떠올려지는 추억 또한 많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둘은 스멀스멀 멀어지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 자신이 그의 쌍둥이 형 얘기를 꺼낼 때마다 명백하게 선을 그었던 것 같다. 가끔 노가리를 까다가 제 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헤벌레 풀어지며 웃길래, 옳다구나 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가려 하면 정태의는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며 벽을 치거나 자리를 피해 버렸다.
아무런 사건 없이 그렇게 급격하게 식어버린 우정을 되돌리고자 여러 방법으로 화해의 자리를 만들었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것들은 오히려 그와의 관계를 더욱 망가뜨릴 뿐이었다.
그런 답없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절망적이게도, 어느 순간부터 멀리 떨어져서 바라 본 정태의의 모습들은 그에게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동기들과 다같이 어울려 몸을 쓰는 게임을 하며 놀다가 보이는 싱그러운 웃음이라든가, 땀으로 흠뻑 젖은 옷 안으로 비치는 몸이라든가, 그 옷을 훌렁 벗으면 보이는 분홍색……. 시발. 여튼 그런 것들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게다가 가끔씩 꾸는 꿈 속에서는……. 개씨발.
그는 제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고자 일부터 정태의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알게 된 그의 성 지향성을 이용해 더욱 악랄하게 그를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소문들이 슬금슬금 나돌며 선임들까지 정태의를 짓궂게 놀려대는 탓에 울컥 열이 받아 결국 위쪽에 괴롭힘을 고발한 건 바로 김정필 자신이었지만 말이다.
더러운 호모 새끼라는 욕을 입에 달고 다니던 김정필에게, 참다못한 정태의가 그를 도발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 게 아니냐는, 누가 봐도 유치한 농담쯤으로 들리는 그 말 한 마디에 김정필은 정곡을 찔렸었다.
원래라면 그게 뭔 개소리냐며 비아냥대다가 적당히 넘겨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각하고도 끝내 인정하지 못하던 감정이 당사자의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파도처럼 사납게 덮쳐오는 당혹감에 이성적인 판단 없이 무작정 화를 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그 일은 씁쓸한 결과를 가져왔다.
"면상 못 본 사이에 사고나 치고 다니고……."
물론 아직까지도 제 감정을 애써 파묻고 있던 김정필이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빠른 시일 내에 윗선에서 거절당한 정태의 구출 작전을 몇 명의 전우들과 비밀리에 실행할 계획이었다.
* * *
상부에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 날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너무나도 위험했기에 김정필은 자신들도 직접 돕겠다는 전우들의 제안을 만류하고 단독으로 마계에 잠입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여러 무기와 첨단 장치들을 건네받아 당당하게 마계 안으로 들어선 그는 예상보다 순조로운 상황에 긴장을 살짝 풀었다.
온갖 방어 기기를 장착하고선 만반의 준비를 한 김정필은 천사군단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능천사답게 빠르게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태의가 잡혀 있다고 추정되는 악마 리그로우의 성 앞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무언가가 이상했다. 성 앞을 지키는 악마가 한 명도 없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연회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텅텅 빈 입구에 김정필의 머릿속에선 의문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다.
게다가 성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린 상태였다. 수상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기에 그는 보란듯이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미리 알아 본 비밀 통로를 찾아 리그로우의 성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설마 했지만 내부 또한 바깥의 상황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성 안은 텅텅 비어 어딘가 음산하게까지 느껴졌다.
천계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인 천궁과 비교해도 결코 주눅들지 않을 정도로 넓고 웅장한 곳을 구경하듯 천천히 거닐며 입을 벌리고 있던 김정필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이곳에 잠입한 목적을 상기하고는 두 손으로 뺨을 철썩 치며 정태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손목에 찬 작은 디바이스는 천사의 특정 생체 신호를 잡아 화면을 통해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려 주는 기기였다. 어쩔 수 없이 예전에 측정하고 폐기하기 않았던 정태의의 정보를 몰래 빼돌리기까지 한 김정필은, 그만큼 단단히 각오를 하고 이곳에 숨어들어 온 것이었다.
얼마 동안 계단을 오르내리며 성을 떠돌던 김정필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에 고개를 퍼뜩 들고는 디바이스를 바라봤다. 목표물과 일정 거리까지 가까워진 건지 화면에는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빨간 점이 깜빡거리며 정태의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김정필은 슬슬 올라가는 광대를 내리려고 애썼지만 입새로 새어나오는 웃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몇 초에 한 번씩 피식거리며 빨간 점이 가리키고 있는 위치로 뛰듯이 걸었다. 악마에게 꼼짝없이 잡혀 있던 그를 구하러 온 게 김정필 자신이라는 걸 안 뒤의 정태의의 반응이 몹시 궁금했다.
감동을 받을까, 고맙다고 할까, 보답하려고 할까. 혹시…… 셋 다?
김정필은 홀로 행복회로를 돌리다가 어느 순간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정색했다.
"……내가 미쳤지."
그 호모 새끼의 반응 따위, 알 게 뭐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잡생각 따위 털어 버리려 한 그였지만 붉어진 귀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빨간 점과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는 하얀 점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은 뛰는 속도를 높여 갔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뭐라고 말을 꺼낼까. 실컷 비웃어 줄까, 아니면 고생했다고 어깨나 몇 번 두드려 줄까. 아, 천계로 돌아가면 밥이나 거하게 한 번 쏘라고 해야겠다. 그러면서 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은 모두 훨훨 털어버리는 게 자연스럽고 좋을 것 같았다.
손목의 장치만 보며 앞으로 나아가자 어느새 눈 앞에는 커다란 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성 안에서 본 것들 중 가장 위압감이 넘치는 그 문을, 김정필은 떨리는 손으로 밀어서 열었다. 소리없이 안으로 밀려 열린 문 틈으로 왠지 더운 공기가 새어나왔다.
고개를 그 사이에 넣고 안쪽을 이리저리 둘러본 그가 본격적으로 더 안쪽을 살피려던 바로 그 찰나.
"―읏, 흐으……―."
"이런―…또 어디서―…."
귀를 건드리는 이상하고 야시꾸리한 소리가 김정필의 발을 멈췄다. 저 안쪽에서 나는 것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말소리는 어딘가, 굉장히 후끈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숨을 조용히 들이쉬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흑―…아윽, 으응―."
그런데 어딘가……. 젖은 목소리가 몹시도 귀에 익었다. 김정필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되게 익숙한 목소리인데. 뭔가 아주 오랜만에 듣는…….
화면 속의 빨간 점과 하얀 점이 거의 겹쳐졌다 싶었을 때, 어느 벽 뒤에 몸을 숨긴 김정필은 며칠 전 그의 동료에게서 받았던 장비를 사용해 벽에 주먹만한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아무런 소리 없이 벽에 뻥 뚫린 구멍 사이로 김정필이 얼굴을 붙임과 동시에.
"하으응!"
"……!!"
김정필은 재빨리 양손을 움직여 입을 틀어막았다. 귀에 들리던 친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깨닫자마자, 구멍 사이로 그 당사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누군가의 허리께에 앉아 있었다. 눈에 익은 구릿빛 피부가 온통 땀으로 젖은 채 위에서 쏟아지는 조명에 의해 번들거리며 빛났다. 귀 끝부터 시작해 목 뒤, 심지어는 어깨까지 붉게 달아오른 그가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인다. 한 번 내려찧을 때마다 찰박이는 물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상체를 단단히 붙든 하얀 손의 주인은 다름아닌 이 성의 소유주, 리그로우였다.
그는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살기어린 눈빛과는 다르게,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듯 애정어린 눈을 하고서 제 위에 올라타 마구잡이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 남자를 잡아먹을 것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가 허리를 높이 띄우는 순간마다 한껏 벌어진 엉덩이골 사이로 믿을 수 없는 굵기의 무언가가 살짝씩 모습을 드러냈다. 김정필은 그것을 발견하고선 입을 막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가히 충격적인 상황을 접하고서도, 그는 부릅뜬 눈을 차마 감을 수가 없었다.
김정필이 그렇게 애타게 찾고자 했던, 이 잠입의 최종 목적인 정태의. 바로 그가 악마 리그로우와 함께 벽 안쪽의 공간에서 질척하게 몸을 섞고 있었다.
문득, 벽에 난 구멍 사이로 그 악마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낯선 공포감에 얼어붙은 김정필과는 다르게, 마치 네가 여기 올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의 악마는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위에서 흔들리는 천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잘 보라는 듯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는 벽 뒤의 김정필에게 들릴 만한 크기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날개 꺼내, 태이."
"하으, 아, 왜애…. 읏, 움직이기, 불편하잖아. 흐윽!"
"보고 싶어."
믿을 수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듯 말한 리그로우가 순간 허리를 세게 추어올리자 자지러지는 신음을 토해 낸 정태의는, 짧게 몸을 떨다가 이내 등 뒤로 커다란 날개를 펼쳤다.
"――!"
날개는 모양, 크기, 그리고 각도까지. 모든 것이 김정필이 기억하는 그대로였지만,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깊은 밤중의 고요하게 가라앉은 어둠보다도 더욱 새까만, 빛조차 삼켜버릴 것 같은 그 흑색이. 하얗고 하얗던 천사의 날개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필은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울 것 처럼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발견한 리그로우가 피식 웃었다. 비웃는 것이 분명했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윽, 아앗, 흐, 아, 아! 일, 일레이, 으응…!"
"태이……. 태이."
내 천사.
악마가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읊조린 한마디는 벽 뒤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김정필의 심장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산산이 깨부숴지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멍하니, 그저 하염없이 벽 안의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일레이. ―좋아…. 아, 하윽…! 좋아해―."
"―나도."
김정필은 그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저 사이에 내가 낄 자리는 이제 단 칸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니, 원래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지독한 패배감에, 그는 고개를 툭 떨구었다.
정태의를 품 안 가득 껴안은 리그로우는 이제 그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고는 자신의 타락한 천사에게 온 감각을 집중하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점점 절정으로 치닫는 격한 추삽질에서 비롯한 난잡한 소리들에 머릿속이 엉망으로 헤집어졌다.
옛 동료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그대로 들으며, 김정필은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그곳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채 가시지 않은 충격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방금 본 장면들을 전부 잊고 싶었다.
"흐윽, 호모 새끼……. 씨발, 정태의… 윽, 호모 새끼 주제에……. 흡…."
어느샌가 양 뺨에 가득 흐르는 눈물을 미처 닦을 새도 없이, 그는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도망치듯 마계를 빠져나가 천계에 도착했을 때, 정태의는 어디다 두고 혼자만 돌아왔냐 묻는 전우들을 보며 모든 것을 아는 김정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